“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김훈, ‘늙기의 즐거움’)소설가 김훈(76)이 산문집 <허송세월>을 냈다. 어느덧 여든에 가까워진 작가는 생과 사의 경계를 헤매고 돌아온 경험담부터 투병 생활, 주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허송세월’을 담아 쓴 45편의 글을 모았다.늙음과 죽음을 바라보는 통찰이 돋보인다. 벗의 화장장에 다녀온 후 쓴 ‘재의 가벼움’이 그런 예다.“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중략)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그는 뼛가루를 바라보며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며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한다.심혈관 계통 질환을 크게 앓았다는 김훈은 “신체 부위와 장기마다 골병이” 든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것인지 자조한다. 뼛가루로 사그라들기 전 어떤 유언을 남길지 고심한다. 그러면서도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 햇빛을 쐬며 생명을 노래한다.원로 작가의 개인적인 일상과 상념이 그의 명료하고 섬세한 문체로 생명력을 얻어 마음에 파고든다.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짐 롤러는 서른 살 때인 1982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으로 이직했다. 스파이 학교를 졸업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정보원을 발굴하고 포섭하는 일을 맡았지만 성과를 못 내고 허우적대기만 했다. 그러다 휴가차 유럽을 방문한 야스민을 만났다. 어느 중동 국가 외무부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이었다.롤러는 자신을 석유 투자자라고 소개하며 접근했다. 야스민이 권력을 잡은 과격한 종교주의자들을 싫어한다고 하자 롤러는 자기 회사에서 시간제 컨설턴트를 찾는다며 슬쩍 떠봤다. 외무부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야스민과 헤어진 롤러는 상사에게 달려가 “드디어 첫 번째 정보원을 포섭했다”고 보고했다. 상사는 “축하한다”며 “이제 자네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CIA에 협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만큼 정보원을 속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대화의 힘>은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대화 기술에 관한 책은 수없이 많지만 이 책은 좀 특별하다.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언론인이며 베스트셀러 <습관의 힘>으로 유명한 찰스 두히그가 썼다. 8년 만의 신작이다. 책에 나온 사례들은 그가 직접 만나 들은 이야기다. 영화 같은 이야기와 각종 연구를 적절히 결합해 유익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책을 만들어냈다.‘호흡이 잘 맞는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났을 때 흔히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사람들 뇌의 전기적 활동을 살펴보니 실제로 그랬다. ‘신경 동조’라고 한다.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영상을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줬다. 이해한 바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뇌파 모양도 제각기 달랐다. 서로 의견을 나누게 한 뒤 다시 영상을 보여줬다. 뇌파의 동기화가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동기화가 유난히 강한 그룹이 있었다.과학자들은 주장이 강한 리더가 강한 동기화를 이끈다고 가설을 세웠다. 사실이 아니었다. 동기화를 강하게 끌어낸 리더는 말이 적었다. 입을 열더라도 대개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반복해서 말하고 자기가 혼동한 부분을 빠르게 인정하며 자신을 농담 소재로 삼았다. 구성원을 격려하고 다른 이의 농담에 잘 웃었다. 특별히 말이 많거나 화술이 뛰어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야스민을 CIA 정보원으로 포섭하려던 롤러도 그랬다. 그는 처음에 좌절했다. 많은 돈을 약속하고 다양한 혜택을 제시해도 야스민은 싫다고만 했다. 롤러는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CIA 요원인지, 얼마나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왔는지 말했다. 어느 순간 야스민이 말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롤러는 2005년 은퇴할 때까지 CIA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보원 포섭가로 활약했다.저자가 말하는 대화의 핵심은 ‘연결’이다. 겉도는 대화가 아니라 상대와 연결됐다는 느낌을 주는 대화여야 한다. 이를 위한 첫 번째 규칙은 ‘어떤 유형의 대화를 나눌 것인지’부터 먼저 정하는 것이다. 의사 결정을 위한 대화인지, 감정을 나누는 대화인지, 사회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대화인지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배우자와의 대화가 다툼으로 번지는 순간이 오면 이렇게 슬쩍 물어보자. ‘지금 당신은 기분을 말하고 싶어? 아니면 우리가 함께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거야?’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의 시간에 대화를 나누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를 때 고성이 오가곤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다 아는 얘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저자의 능수능란한 글솜씨 덕분인지 그 다 아는 얘기가 새롭게 다가온다.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 주변에는 산 자보다 죽은 자의 수가 더 많은 죽은 자들의 도시, 거대한 묘지가 건설되고 있다. 이 영원한 사후세계는 누가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까?디지털 윤리학자이자 스웨덴 웁살라대 정치학과 교수인 칼 외만은 <데이터의 사후세계>에서 이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과거 외만 교수는 죽은 사람의 페이스북 프로필 수가 50년 안에 살아 있는 사람 수를 넘어설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연구에 따르면 21세기 말에는 페이스북에 망자의 계정이 50억 개가 넘을 수도 있다.저자는 디지털 세계에서 추모와 보존의 의미를 되묻는다. 죽은 자의 시신을 더럽히는 행위는 어디서나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망자에게도 권리가 있다. 이젠 망자의 데이터, 즉 또 다른 종류의 시신인 ‘디지털 시체’를 존중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때다.‘디지털 시체’에 대한 모독은 무분별한 방치를 통해 이뤄진다. 통념과 달리 전자 데이터는 영구적이지 않다. 시간이 지나고 관리가 이뤄지지 않을수록 디스크는 손상되고 정보도 손실된다. 외만 교수는 데이터 저장의 무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익 창출이 목적인 소셜미디어 회사가 망자의 정보를 유지하는 데 돈을 쓸 유인이 있을까?앞서 2019년 트위터(지금의 X)는 6개월 이상 활동하지 않은 계정을 삭제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사망한 사용자 계정의 데이터 손실 가능성을 우려한 망자 가족과 친구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트위터는 계획을 철회했다. 이후 이 회사를 인수한 일론 머스크는 “몇 년 동안 활동이 전혀 없는 계정을 삭제하고 있다”며 최근 과거의 계획을 다시 추진 중이다.사후에도 계정을 활성 상태로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 혹은 무언가가 대신 계정을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외만 교수는 무슬림을 위해 소셜미디어에 자동 기도 게시물을 올려주는 서비스가 이용자가 죽은 뒤에도 지속돼 망자의 계정에서 하루에 거의 200만 건의 기도 트윗을 생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외만 교수는 “수십 년 후 X에선 죽은 자들이 적어도 게시물의 양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사회적 현상 중 하나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디지털 시체에 인공지능(AI)을 결합해 고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망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앱도 등장했다. 기술을 통해 망자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외만 교수는 50년 내에 온라인 세계엔 자의식을 가진 죽은 자들, 즉 수백만 명의 ‘디지털 유령’이 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물론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진정한 의식을 갖춘 AI를 구축하는 방법을 아는 이가 없다. 그러나 일부 사람이 이미 이 가능성을 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디지털 세계에서 죽은 자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소셜미디어 피드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 숨 쉬는 지금, 우리는 죽은 자의 두개골을 집에 보관한 고대인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됐다.데이터 보존 문제는 망자에 대한 기억과 존중을 넘어 역사적 기록 유지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 소셜미디어 사이트는 경제적 인센티브 없이는 스스로를 역사적 데이터와 문화유산의 아카이브로 여기지 않는다. 한 인권단체는 2007~2020년 학대 문제와 관련해 기록한 소셜미디어 증거 중 11%가 이미 삭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저자는 데이터의 사후세계를 위해 새로운 종류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데이터 보존 및 관리를 위해 국가와 비정부기구, 민간 기업을 포함한 복수의 기관이 망자의 데이터를 감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력으로 디지털 사후세계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한다.정리=신연수 기자이 글은 WSJ에 실린 스티븐 풀의 서평(2024년 5월 22일) ‘The Dilemma Of Digital Ghosts’를 번역·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