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제시키안, 서방 관계 개선 앞세워…강경 잘릴리도 외교통
'보수 결집' 전망 넘어설 만큼 '변화 기대' 표심 돌아설지 주목
[현장@이란대선] '개혁 돌풍' 이면엔…정치 불신 뚫고나온 제재 완화 열망
전 대통령의 헬기 추락사라는 급변으로 치러진 이란 보궐선거에서 무명에 가까운 개혁파 정치인이 1위로 결선행 티켓을 거머쥔 이변의 바탕에는 서방의 제재로 오랫동안 곪아온 민생고가 자리 잡고 있다.

이슬람 지도층에 '콘크리트 지지'를 보내온 보수 시민들이 결선투표에서 결집하리라는 전망 속에서도 3년 만에 다시 개혁 성향 정권이 들어설지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리는 모습이다.

29일(현지시간) 이란 내무부 발표에 따르면 전날 투표에서 대선후보 4인 중 마수드 페제시키안(70) 마즐리스(의회) 의원이 42.5%로 최다 득표자가 됐다.

이달 초 중도·개혁 성향 출마자 중 인지도가 떨어지는 페제시키안에게만 후보 자격이 허용됐을 때만 해도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 등 보수 지도층이 실제 당선 가능성이 적은 이를 '구색 갖추기'로 세웠다는 해석이 나왔다.

정작 선거전에 돌입하자 서방과 대화를 통한 경제난 개선, 히잡 착용 여부 단속 완화 등을 외치는 그에게 여성·청년층을 중심으로 지지가 모였다.

아제르바이잔계 부친, 쿠르드족 핏줄 모친 등 소수민족 부모를 둔 배경도 소외계층을 끌어모았다.

여기에 하산 로하니 전 대통령, 모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외무장관 등 개혁 진영 거물의 지지 선언이 잇따르며 추진력을 받았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페제시키안은 기회주의적 언사를 취하지 않는 매력적 인물이지만 대중적이지는 않았다"라며 "자리프 전 장관과 같은 인사들이 강력하게 밀어주면서 돌풍의 동력이 생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장@이란대선] '개혁 돌풍' 이면엔…정치 불신 뚫고나온 제재 완화 열망
보수 진영 지지를 양분해온 강경파 사이드 잘릴리(59) 전 외무차관이 38.6%로 2위에 오른 것도 다소 예상 밖이라는 시각이 있다.

표심 분산 우려로 투표일 직전 아미르호세인 가지자데 하셰미(53) 부통령과 알리레자 자카니(58) 테헤란 시장 등 보수 군소후보 2명이 사퇴하며 단일화 필요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 초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던 모하마드 바게리 갈리바프(63) 의회 의장과 잘릴리 캠프 사이 협상은 결렬됐고, 결국 중도 확장을 염두에 둔 듯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하던 갈리바프가 13.8%의 저조한 득표로 탈락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지명도 자체는 갈리바프가 높지만 이란의 보수파는 이슬람 등 이념에서 잘릴리가 더 순수하다고 봤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보수 진영이 '하메네이 충성파' 잘릴리를 에브라힘 라이시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결선에서 맞붙는 두 후보의 성향은 극과 극이지만 외교 분야에서 경륜을 닦은 전문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경제난이라는 내부 문제의 돌파구를 대외관계에서 모색할 수밖에 없는 이란의 특수한 상황이 투영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김혁 한국외국어대 페르시아어·이란학과 교수는 "민생고의 주원인은 이란 고립을 초래한 제재"라며 "보수는 이란핵협상(JCPOA)의 초석을 닦은 잘릴리를, 진보는 서방과 대화를 앞세운 페제시키안을 대외정책 변화의 적임자로 본 것"이라고 말했다.

역대 두 번째로 현실화한 내달 5일 결선투표의 관건은 투표율이다.

먼저 후보 3인에게 나뉘었던 보수 표심은 결선에서 결집할 가능성이 크다.

잘릴리와 갈리바프 두 명의 득표만 합쳐도 산술적으로 52.5%다.

갈리바프 지지자 일부가 이탈하더라도 50% 선의 지지를 이미 확보한 셈이 된다.

페제시키안이 이기기 위해서는 1차 투표를 보이콧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려세워야만 한다.
[현장@이란대선] '개혁 돌풍' 이면엔…정치 불신 뚫고나온 제재 완화 열망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 공화국이 세워진 이래 대선과 총선을 통틀어 역대 최저치인 40.3%를 기록한 1차 투표율이 이번 선거 참여도의 한계일지, 각 후보의 '샤이 지지층'이 얼마일지는 미지수다.

박 교수는 2013∼2021년 로하니 정부 때 개혁 추진이 미진했던 점, 2018년 미국의 JCPOA 파기로 제재가 강화한 경험을 거론하며 "로하니를 향한 배신감, 실망감이 여전한 젊은 층이 얼마만큼 투표장으로 돌아올지를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재작년 '히잡 시위'를 지켜본 뒤 처음 선거권을 갖게 된 만 18∼20세 유권자 비중이 크다"라며 "기대심리가 살아난 개혁파는 결선 참여도가 높을 것이고 오히려 보수에서 숨은 강성 지지층이 얼마나 될지가 문제"라고 짚었다.

한편 페제시키안이 최종 당선되더라도 변화는 미미하거나 점진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여러 정책에 할 말을 해온 그이지만 현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는 점에서다.

인 교수는 "최도지도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페제시키안이 급한 유턴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경제난 해소를 위한 서방과의 개임이 재개될 수 있고, 장기적으로 하메네이의 후계 구도에도 변수가 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란 지도부와 미국의 성향이 엇갈리는 '리더십 미스매치'에 다시금 이를 가능성도 거론된다.

전통적 외교를 중시하는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첫 대선토론에서 완패했다는 평가 속에 미국 우선주의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할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이란대선] '개혁 돌풍' 이면엔…정치 불신 뚫고나온 제재 완화 열망
과거 이란에 개혁 성향 하타미 정부가 들어섰을 때 미국은 보수적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집권했고, 미국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1기 때는 반서방 기치를 높게 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이란 대통령이었다.

이란 로하니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JCPOA 파기를 겪었고, 바이든 미 대통령 때에는 라이시 전 대통령이 대서방 강경 태도로 일관했다.

인 교수는 "일단은 이란 결선 결과를 봐야 하지만 미국 대선이 이란에 '또 다른 저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