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버리 영국 매장 전경. 사진=한경DB
버버리 영국 매장 전경. 사진=한경DB
지난달 29일 토요일 오전 찾은 경기 여주 신세계프리미엄아울렛. 버버리 매장은 별다른 대기 없이 바로 입장 가능했다. 비슷한 가격대의 프라다 구찌 생로랑 등의 매장이 30분 이상 대기해야 입장할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인근 매장 한 점원은 “버버리 매장에 대기가 사라진 게 1년 이상 됐다”고 전했다.

영국 명품패션업체 버버리그룹 주가가 1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맴돌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주가가 37.3%(지난달 29일 종가 기준) 떨어졌다. 최근 1년간으로 범위를 넓히면 주가가 60% 가까이 폭락했다. 올해 3월30일까지 연간 이익이 전년 대비 40% 감소한 3억8300만 파운드(약 6705억원)를 기록하는 등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버버리의 실적 부진은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버버리의 위기는 최대 시장인 미국, 중국 등에서 명품 소비 침체 직격탄을 맞은 게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안감에 특유의 체크무늬 패턴이 새겨진 버버리 트렌치코트 하나쯤은 장만해야 한다고 여기던 전세계 중산층 고객은 이제 루이비통이나 프라다, 미우미우 등 경쟁사 제품을 택하는 분위기다.

12년 만에 최악의 상황

버버리는 약 170년간 전세계 '트렌치코트'의 대명사로 자리 잡을 정도로 명품 의류 시장에서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 ‘바바리’라는 트렌치코트의 우리 식 별칭도 버버리 브랜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나가던 버버리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버버리 대표 제품인 트렌치코트. 사진=한경DB
버버리 대표 제품인 트렌치코트. 사진=한경DB
버버리는 1차 세계대전 때 영국 군인들을 위해 만든 레인코트에서 출발했다. 특유의 고급스러운 원단과 편안함, 크게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전세계 부유층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버버리의 트렌치코트의 인기가 높아 영국에서 수출되는 코트 다섯 개 중 하나는 버버리 제품이었을 정도였다.

명품 시장에서는 버버리가 수십년 넘는 기간 흥행에 취해 판매량을 조절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공급을 풀었다는 점에서 부진의 원인을 찾고 있다. 버버리는 최근까지 제품 대부분을 현지 에이전트들에 의한 직수입, 도매, 라이선스 방식으로 판매해 왔다.

무분별한 확장 전략을 펼치면서 브랜드 이미지 관리나 가격 통제에 대한 시스템을 적절히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국내 시장을 비롯해 중국 등 일부 국가들에서는 짝퉁 제조와 대량 세일이 브랜드 가치 하락과 고급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위기까지 몰고 왔다.

뒤늦게 미국 등 대규모 시장 중심으로 도매 비중을 줄이고 제품 유통과 라이선스를 회수하는 등의 수요 통제에 나섰지만 큰 효과는 없는 실정이다. 최대 고객층인 중산층이 버버리에 대한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입는 제품이 식상해진 데다 판매 채널에 따라 가격이 들쑥날쑥한 버버리를 ‘제 돈 주고’ 사기엔 수요를 자극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난립하는 가품도 브랜드에 대한 피로감을 더했다. 버버리가 최근 한국과 중국 시장 등에서 자사의 ‘체크무늬 디자인’과 상표명을 두고 전방위 소송전을 펼치는 것에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

트렌드 변화에 둔감했다

버버리가 시대 트렌드의 변화에 둔감했던 게 매출 하락의 주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버버리는 중장년층만을 위한 브랜드라는 인식을 깨기 위해 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리카르도 티시를 고용해 2018년 버버리 로고의 폰트를 현대적으로 교체하고 모노그램을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패션 비평가들은 티시의 스트리트웨어 미학이 젊은 쇼핑객을 일부 끌어들이긴 했지만 영국의 고전적 테일러링에 대한 명성을 활용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설상가상 후드티셔츠에 올가미처럼 보이는 밧줄 목걸이를 매단 디자인으로 폭력성 논란에 휘말리며 이미지가 실추되고 이 과정에서 대중성을 일부 잃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폭력 논란이 일었던 ‘2019 가을·겨울 컬렉션 패션쇼’에서 등장한 버버리의 논란의 티셔츠. 사진=SNS 캡처
폭력 논란이 일었던 ‘2019 가을·겨울 컬렉션 패션쇼’에서 등장한 버버리의 논란의 티셔츠. 사진=SNS 캡처
버버리는 2022년 디자이너 다니엘 리를 영입해 ‘리브랜딩’으로 고급화를 꾀하는 중이다. 다니엘 리는 버버리에 오기 전 보테가 베네타를 부흥기로 이끈 장본인이다. 당시 침체기를 걷고 있던 브랜드를 180도 바꿔 성공시켰던 것처럼 이번 역시 기존 버버리에선 떠올리기 힘든 혁신을 기대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진 눈에 띄는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시장의 판단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리의 2023년 가을 데뷔 컬렉션에서는 가방 가격이 2910유로(약 432만원)이고 울 덕 비니의 가격이 거의 3500유로(약 519만원)였다”면서 “고객은 에르메스나 루이비통 매장에서는 이 같은 금액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지만 아직 버버리는 이 수준이 아니다”라고 혹평했다. 버버리의 주요 소비층이 경제적 상황에 민감도가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버버리 영국 매장 전경. 사진=한경DB
버버리 영국 매장 전경. 사진=한경DB
버버리가 주춤하는 사이 라이벌 루이비통, 프라다 등에다 미우미우 같이 보다 저렴한 제품으로 인식되던 브랜드까지 세를 확장하고 있다. 버버리가 방향성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사이 다른 브랜드들은 기능과 디자인 혁신에 총력을 기울였다. 프라다는 지난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7% 늘었으며 미우미우는 무려 89% 급증했다.

버버리가 인수·합병(M&A) 시장의 타깃이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런던 시내 17개 M&A 데스크 펀드 매니저, 애널리스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버버리가 잠재적 인수 표적 1위로 올랐다. 기업가치가 추락하고 파운드화 가치가 낮아지면서 잠재적 입찰자들의 인수 의욕을 높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