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핵우산'은 과연 튼튼한가
2015년 4월 어느 날 저녁, 미국 워싱턴DC 한 레스토랑에서 핵 문제를 다루는 과학자들과 의회 관계자, 관료들이 모인 비공개 행사를 취재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찰스 퍼거슨 미국 과학자협회(FAS) 회장은 '한국의 핵무장 시나리오'를 회람하면서 "한국은 단기간 내 수십 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충격적 주장을 꺼냈다.

구체적으로 월성 원전 4개의 가압중수로(PHWR)에서 추출 가능한 준(準)무기급 플루토늄을 활용해 5년 이내에 수십 개의 핵탄두를 만들 수 있다고까지 했다.

당시로선 황당한 가설이었는데, 퍼거슨이 한국의 실제 핵무장 가능성을 주장하려는 건 아니었다.

북핵 문제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던 오바마 행정부를 움직여보려는 게 진짜 의도였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퍼거슨의 가설은 우리 사회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논&설] '핵우산'은 과연 튼튼한가
국내 외교안보 전문가그룹 내에서는 한반도 비핵화가 비현실적이며 북한 핵무기와 핵물질 생산을 검증 가능하게 동결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국민이 더 불안해하는 것은 북핵 자체보다도 남북한 간에 핵 균형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북한이 수년 내 핵무기 300개 이상을 손에 쥘 능력을 갖는다는데, 미국의 핵우산은 실체가 와닿지 않는 어음과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자체 핵무장론이 꾸준히 생명력을 이어가는 이유다.

그러나 한국의 자체 핵무장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다.

우리에게 안보와 경제, 국제적 평판에 '퍼펙트 스톰'이 몰아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선(線)을 넘지 않으면서 언제든지 핵무기를 만들 잠재력이라도 갖추자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만만치 않다.

[논&설] '핵우산'은 과연 튼튼한가
한미원자력협정 협상이 한창이던 2014년 10월 미국 핵 개발의 산실인 일리노이주 아르곤연구소를 방문한 일이 있다.

당시 장윤일 수석연구위원은 한미가 공동 연구 중인 사용후 핵연료 재활용 기술인 파이로프로세싱을 소개하며 "습식 재처리와 달리 본질적으로 확산 저항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포화상태에 이른 사용후 핵연료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면서도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가능성이 작으니, 미국이 승인해달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듬해 개정된 협정에는 파이로프로세싱의 전반 공정을, 그것도 연구개발 차원에서 허용했을 뿐이다.

우라늄 농축도 미국과의 사전협의를 전제로 20%의 저농축만 인정했다.

이런 미국을 움직이지 않고는 핵 잠재력을 구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같은 미국의 동맹인 일본이 재처리와 20% 이상 고농축을 허용받은 것과 비교하면 명백한 차별대우다.

[논&설] '핵우산'은 과연 튼튼한가
북핵 대응의 큰 그림을 새롭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왔다.

안보 도박에 가까운 자체 핵무장론보다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핵 보장'을 명료히 하는 방향에서 가용한 옵션을 검토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견해다.

우선 높아진 국내의 핵무장 여론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 조야를 상대로 외교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확장억제가 국내에서 분출하는 핵무장론을 불식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설명하고, 미국이 핵우산 제공의 전략적 명확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어도 일본 수준의 핵 잠재력을 갖출 수 있도록 미국을 움직여야 한다.

얼굴을 붉히더라도 할 말을 하는 게 외교다.

지금은 바이든 행정부이지만 트럼프 재집권 시에도 대비한 다각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국론이 분열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정치권이 여야와 정파를 넘어선 접근을 해야 한다.

외교안보 관료와 전문가, 학계 인사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초당적 플랫폼이 필요한 때가 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