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와 창업, 상속 등으로 자산을 늘린 ‘슈퍼 리치’가 대거 탄생하며 자산관리(WM)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한 자산가가 서울 반포동 래미안원베일리 상가에 있는 KB금융그룹 프라이빗뱅킹(PB)센터에 들어가고 있다.   최혁 기자
투자와 창업, 상속 등으로 자산을 늘린 ‘슈퍼 리치’가 대거 탄생하며 자산관리(WM)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한 자산가가 서울 반포동 래미안원베일리 상가에 있는 KB금융그룹 프라이빗뱅킹(PB)센터에 들어가고 있다. 최혁 기자
금융자산 3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가 국내 증권사에 맡긴 자산이 1000조원을 돌파했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노후 대비와 증여를 위해 금융상품 가입을 크게 늘리고 창업과 주식, 암호화폐 등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청년 갑부(영리치)까지 뭉칫돈을 들고 금융회사를 찾고 있다. 자산관리(WM)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증권사와 은행은 초고액 자산가(슈퍼 리치)를 잡기 위해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1일 한국경제신문이 국내 주요 증권사 열 곳의 WM·리테일(소매금융) 자산 추이를 분석한 결과 지난 5월 기준 이들의 자산 규모는 총 1060조원으로 집계됐다. 작년 말 1000조원을 넘어섰고 올해 들어서도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1월부터 5월까지 54조원 늘었다. 매달 11조원이 증권사로 유입된 것이다.

일찍부터 자산가 영입에 공들여온 삼성증권에는 이 기간 14조8000억원이 들어왔다. 한국투자증권(11조8000억원), KB증권(8조3000억원), NH투자증권(8조1000억원), 미래에셋증권(7조1000억원) 등도 올해 들어 자산이 눈에 띄게 불어났다.
그래픽=전희성기자
그래픽=전희성기자
슈퍼 리치가 금융시장의 핵으로 떠오르자 금융사들은 잘나가는 프라이빗 뱅커(PB)를 영입하고 차별화한 상품을 내놓는 데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공모주 펀드와 인수금융, 벤처캐피털(VC), 사모펀드(PE) 등 그동안 기관투자가를 상대하던 사업 부문도 자금 유치 전략과 투자 방식을 바꿔가며 슈퍼 리치 모시기에 나섰다.

김성환 한국투자증권 사장은 “최근 5년간 한국투자증권의 리테일 자산 규모가 연평균 24% 증가했을 정도로 고액 자산가들이 증권사의 고수익 상품에 몰리고 있다”며 “우리나라 가계 순자산 1경원 중 부동산을 제외한 현금성 자산이 약 5000조원임을 고려할 때 WM 시장은 성장 잠재력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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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관리(WM) 시장이 대격변기를 맞았다. WM 시장을 주도하는 고액 자산가들은 그동안 주거래은행의 예·적금 상품에 자산을 맡기고 프라이빗뱅커(PB)가 소개하는 투자상품으로 자산을 불려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증권사 자산운용사 벤처캐피털(VC) 사모펀드(PEF) 등 다양한 투자 플랫폼으로 ‘부의 대이동’이 이뤄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진단이다. 특히 채권, 펀드, 주가연계증권(ELS) 등 금융 파생상품 거래 창구인 증권사가 WM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 가계가 보유한 순금융자산(약 3000조원)의 3분의 1인 1000조원이 국내 증권사로 유입되며 ‘머니 무브’가 가속화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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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50조원에 불과하던 국내 증권사의 WM 자산 규모는 7년 만에 1000조원대로 네 배 가까이 불어났다. WM 자산은 고액 자산가를 비롯한 개인투자자와 법인이 맡긴 자금 중 주식을 제외한 금융상품에 투자한 자산을 뜻한다.

증권사 WM 자산의 연평균 증가율(CAGR)은 22%에 달한다. KB증권의 WM 자산은 7년 만에 5배 늘어나며 최근 60조원을 돌파했다. 작년 8월 이후 10개월간 10조원 증가했다. 1000억원 이상 초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하는 삼성증권의 ‘패밀리오피스’ 고객도 4년 만에 100가문을 넘었다. 자산 규모는 30조원을 돌파했다.

올해 들어 미국 일본 인도 등 글로벌 증시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비트코인, 원자재 등 모든 자산 가격이 급등하는 ‘에브리싱 랠리’가 펼쳐진 것이 ‘WM 빅뱅’의 도화선이 됐다. 해외 주식과 암호화폐, 채권 투자 수익률이 고공 행진하자 안전자산을 빼 증권사로 옮기는 자산가가 늘어난 것이다. WM 자산 중 올해 자금 유입이 가장 많은 상품은 국고채·미국 국채 등 채권과 신탁,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 등으로 나타났다.

WM 시장은 대한민국 상위 1% 소수의 슈퍼리치가 주 고객이었으나 최근 들어 개인투자자 대상 리테일(소매금융)과 경계가 흐려지는 추세다. 고액 자산가로 성장한 ‘슈퍼개미’의 숫자가 급증하면서다. KB금융의 부자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 10억원 이상 부자는 계속 늘고 있다. 2019년 32만3000명에서 작년 45만6000명으로 4년 만에 41.2% 증가했다. 이들이 보유한 총금융자산은 2747조원, 한국 전체 가계 총 금융자산의 59%다. 이재경 NH투자증권 PMW사업부 총괄대표는 “2000년대 초반엔 1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고객을 유치하면 증권사 영업점에 플래카드가 걸릴 정도로 ‘큰손’ 대접을 받았다”며 “요즘은 100억원, 1000억원 이상 부자가 증권사마다 수백 명씩 된다”고 했다.

IPO와 M&A가 키운 WM 생태계

초고액 자산가가 급증한 배경에는 자본시장 발전과 투자 활성화가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제로 금리 시대가 열리며 창업과 투자, 거래가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신흥 부자가 등장하며 WM 시장의 새로운 축으로 부상했다.

기업공개(IPO)와 인수합병(M&A) 시장의 성장은 WM 생태계를 확장한 일등 공신이다. 2021년 IPO 호황기 때 줄줄이 계열사를 상장한 카카오그룹은 수십억원대 월급쟁이 부자를 쏟아냈다. 카카오게임,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에서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과 자사주로 고액 자산가 반열에 오른 임직원은 500여 명에 달한다. 네이버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지난달 27일 미국 나스닥시장에 상장한 네이버웹툰(웹툰엔터테인먼트)의 김준구 대표는 현금과 스톡옵션 등을 통해 900억원가량을 챙겼다.

SK그룹과 두산로보틱스, LG에너지솔루션 등 대기업에서도 상장 때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우리사주를 받은 임직원들이 돈방석에 앉았다. 조 단위 기업 하나가 상장하면 10억원 이상 부자가 수십 명 쏟아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M&A 거래가 활발해지며 회사를 매각해 고액 자산가가 된 이도 적지 않다. 폐기물처리업체 바이오에너지팜아산 창업자 박용한 회장은 최근 PEF인 VIG파트너스에 회사를 1000억원대에 매각했고, 화장품 제조사 마녀공장을 창업한 김현수 전 대표는 엘앤피코스메틱에 회사를 팔아 300억여원을 손에 쥐었다.

강준규 대신증권 WM 전무는 “자본시장에서 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스노볼’ 효과를 경험한 영리치들이 WM 시장의 빅뱅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예진/박한신/류은혁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