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부자가 떠나는 나라, 들어오는 나라
중국 부자들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처음 느낀 것은 2010년대 중후반이다. 중국 정부가 시진핑 주석의 장기 집권을 위해 경제, 사회 부문 통제를 강화하면서다. 관변 언론들은 ‘공동부유’를 외쳤고, 사정당국은 빅테크 규제에 착수했다. 그러자 불안함을 느낀 중국 부자들이 움직였다. 해외로 자산을 빼돌리는 ‘차이나 런’이 본격화한 것이다.

아시아 각국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중국 부자 모시기’ 경쟁을 벌였다. 싱가포르가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였다. 경제 컨트롤타워인 싱가포르 경제위원회(EBD)는 2019년 패밀리 오피스 개발팀(FODT)을 구성해 중국 부자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이듬해엔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와 두바이가 움직였다. 패밀리 비즈니스에 세제 혜택을 주고 밀착 지원하는 가족 사업법을 마련했다.

세계는 '패밀리 오피스' 전쟁 중

효과는 엄청났다. 2010년대 중반 50여 개 수준이던 싱가포르의 패밀리 오피스는 올해 1400개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싱가포르의 자산관리(WM) 규모는 1조달러(약 1399조원)나 불어났다. UAE의 가족 기업 설립 건수도 치솟았다. 중국에서 빠져나온 부자들은 싱가포르에 자산을 맡기고, 두바이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동산을 산다.

비단 중국뿐만이 아니다. 요즘 전 세계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부(富)의 이동은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각국의 정치 리스크가 부각되자 더 나은 곳을 찾아 수백조원의 자금이 국경을 넘나든다. 글로벌 투자자문업계에선 올해 역대 최대인 13만~15만 명의 ‘슈퍼 리치’가 다른 나라로 떠날 것이라고 한다. 싱가포르 UAE 호주 캐나다 등은 이들을 유치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부자 일가족이 한 국가의 고용과 소비에 미치는 효과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시아권에서 이 WM 전쟁에서 한참 비켜나 있는 나라들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한국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하다. 외환 거래는 최근까지 30년 넘은 규제에 꽁꽁 묶여 있고, 상속세·소득세 세율도 주요국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차이나런이 본격화하고 싱가포르 정부가 패밀리 오피스 지원 전담 부서를 두던 그해에 한국은 오히려 개인들의 투자 소득에 더 많은 세금을 물리겠다며 금융투자소득세를 도입했다.

우리는 참전할 준비가 됐나

국제 투자이민 자문회사인 헨리앤드파트너스가 며칠 전 발표한 글로벌 자산 이동 리포트에는 한국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리포트는 ‘전 세계 부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로 UAE와 미국 싱가포르 호주 캐나다 스위스 일본 등을 꼽았다. 한국은 순위에 없냐고? 있다. ‘부자들이 빠져나올 나라’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중국 영국 인도 한국 러시아 순이다. 전쟁 중인 러시아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자산가가 탈출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한국의 패밀리 오피스 시장은 꽤 빠르게 발전하는 중이다. 하루가 멀다고 슈퍼 리치가 탄생하고 금융자산 비중도 커진다. 국내 금융회사의 상품 개발 능력과 글로벌 딜 소싱 능력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민간은 준비가 됐다. 이제 정부와 정치권이 답해야 한다. 한국은 부자들이 떠나는 나라가 될 것인가, 들어오는 나라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