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퇴직연금 의무화의 전제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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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 규제 풀어 수익률부터 높여야
이상열 경제부장
올해로 퇴직연금을 도입한 지 20년이 되면서 이런 기대는 그야말로 헛된 꿈이었다는 게 입증됐다. 제도를 도입한 기업들이 매달 근로자 급여의 8.33%를 납부하면서 퇴직연금 적립금은 어느덧 400조원이 됐고 10년 뒤엔 1000조원까지 불어날 것이라지만 누구도 퇴직연금을 ‘2층 연금’으로 보지 않는다. 지난해 연금 형태로 퇴직연금을 받은 사람은 10%뿐이었다. 나머지 90%는 평균 1645만원을 일시금으로 받아 갔다.
중도 인출을 너무 쉽게 허용한 이유도 있지만 정기예금 등 원리금 보장상품에 자금의 90%가 몰리면서 운용수익률이 물가상승률조차 못 따라갈 정도로 낮은 것이 핵심 원인이다. 국내 퇴직연금의 연환산 수익률은 최근 5년과 10년간 각각 2.35%, 2.07%에 그쳤다. 확정급여형(DB)이든 확정기여형(DC)이든 퇴직연금 가입자(기업과 근로자)는 투자 상품 및 비율을 스스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손실(시장 위험)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투자 및 금융상품 정보가 부족한 가입자 대부분은 원리금 보장형에 적립금을 방치했다.
이런 문제는 사실 다른 국가에서도 빚어졌다. 그래서 미국(401K), 호주(마이슈퍼) 등 퇴직연금 선진국이 2000년대 도입한 게 DC형 디폴트옵션이다. 이른바 ‘넛지 이론’에 기반해 가입자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하도록 설계해 연 7% 이상의 수익률을 거둘 수 있었다. 한국도 이들 선진국 사례를 참고해 작년 7월부터 ‘사전지정운용제’로 불리는 ‘한국형 디폴트옵션’을 시행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가 예견한 대로 한국형 디폴트옵션은 사실상 실패작으로 판명 나고 있다. 해외와 정반대로 가입자가 원리금보장 상품을 포함한 6~7개 상품 중 1개를 선택하도록 제도를 설계한 탓이다.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달라진 게 없다 보니 디폴트옵션 시행 후에도 만기도래한 자금의 90%가 원리금 보장형에 몰리고 있다. 현재 퇴직연금 운용체계는 사실상 지난 20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정부가 3일 ‘역동경제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퇴직연금의 단계적 의무화 방침을 밝혔다. 아직도 30%가 안 되는 퇴직연금 도입률을 높여 가계 자산 확충과 노후 대비를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강제 조치가 바람직하냐는 논란을 차치하고 설사 의무화하더라도 현재 운용체계 아래에서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확실한 수익률 제고 방안부터 수립하는 게 먼저다. 원리금 보장형보다는 글로벌 자산에 장기 분산투자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디폴트옵션부터 재설계해야 한다. 같은 펀드인데 상장지수펀드(ETF)를 디폴트옵션 대상에서 빼놓고, 공모펀드보다 경쟁력이 높은 사모펀드마저 투자 대상에서 원천 배제하는 등 불합리한 운용 규제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가입자가 원하면 민간 전문가 등에게 운용을 맡기는 제도 도입도 검토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