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에 비견되는 전쟁문학 걸작…'삶과 운명' 번역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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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 직접 겪은 2차대전 참상 소설화
1959년 완성해 1980년 스위스서 첫 출간…전체주의에 관한 정교한 초상화 러시아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1905~1964)은 2차대전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 있던 종군기자였다.
폐결핵을 앓은 데다 도수 높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서 무기라고는 손에 쥐어본 적도 없던 소련의 유대계 청년 작가 그로스만은 독일-소련 전쟁이 시작되자 자원입대해 붉은 군대의 종군기자가 된다.
1941년 8월부터 전선에서 신문 '붉은 별'에 전투 기록을 연재하기 시작한 그로스만은 이후 1천일 이상 전장에 체류하면서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심경을 자세히 기록한다.
특히 그는 1942년 남부전선군에 몸담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했다.
나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를 포위한 뒤 벌어진 약 6개월간의 전투는 2차대전의 전투 중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됐다.
그전까지 연합군은 나치 독일의 파죽지세에 계속 밀리다가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소련 승리를 계기로 비로소 승기를 잡았지만,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이 전투에서만 200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그로스만은 이후 소련군이 폴란드로 진격할 때는 탈환하는 도시로 들어가 트레블링카 등지에서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의 결과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했다.
아울러 소련군의 베를린 함락과 소련군이 전쟁에 패배한 독일인들에게 저지른 만행들까지도 그는 꼼꼼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참혹한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쓴 대하소설이 '삶과 운명'이다.
스탈린이 죽고 난 뒤 해빙기였던 1960년 작가는 출간을 시도했지만 출판 금지 처분에 이어 정보기관 KGB에 원고마저 압수당했다.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하던 '삶과 운명'의 원고는 작가의 사후 10년 뒤에야 마이크로필름으로 비밀리에 찍어둔 사본이 서방으로 전해져 1980년 스위스에서 처음 출간될 수 있었다.
'현대 러시아문학 최고 업적 중 하나'로 칭송받는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 '삶과 운명'이 전 3권으로 최근 국내에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의 번역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삶과 운명'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모티브로 두 전체주의 세력인 나치즘과 스탈린 체제 공산주의 정권의 대중동원, 강제노동, 대학살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소재와 주제 의식, 스케일 면에서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와 비견되기도 하는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독일-소련 전쟁의 스탈린그라드전투를 중심으로 스탈린과 히틀러 치하에서 신음하던 인간의 가혹한 삶과 운명을 매우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은 1942년 가을부터 1943년 봄까지 반년간을 배경으로 모스크바에서 카잔으로 피난 온 물리학자 시트룸과 그 가족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독일과 소련의 수용소를 세 축으로 삼아 전개된다.
이 작품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총체성이다.
작가는 전선의 병사와 후방의 시민들은 물론, 독일군과 소련군 장군들, 양쪽 수용소의 수감자들,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수뇌부에 이르기까지 2차대전에 관계된 모든 종류의 인물을 소설로 소환했다.
각양각색의 인간군상을 통해 작가가 말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폐해와 개인의 위대함이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와 유대인 절멸을 위한 가스실 운용, 스탈린 시대의 가혹한 숙청과 노동교화수용소의 참상, 히틀러와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적 국가권력에 굴종해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내면, 히틀러와 스탈린의 심리 상태까지 2차대전의 다양한 측면들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 소설은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정교한 초상화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기념비적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과 더불어 집단과 전체에 대한 개인의 굴종과 그에 따른 개인성의 말살을 탁월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늘 언급돼왔다.
"러시아에 있는 수백만의 시골 이즈바(통나무집) 가운데 서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고유하다.
똑같은 두 인간, 똑같은 두 송이 들장미는 상상할 수 없다…… 삶은 그 고유성과 독특성을 폭력으로 지워 없애려는 곳에서 고사(枯死)한다.
"
소설의 첫 부분인 1부 1장에 나오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작가는 2차대전 와중에 극한의 폭력과 인간성 말살에 직면한 평범한 개인들이 끝까지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잃지 않은 채 행하는 선(善)에 주목한다.
학살을 앞둔 상황에서 어제의 이웃이 오늘은 적이 되어 침을 뱉는 상황에서도 애써 감자 한 알을 나누는 사람들, 자신의 집에 기어들어 온 죽기 직전의 포로를 목숨을 걸고 보살펴 살려내는 우크라이나 노파 등을 통해 그로스만은 한 사람의 삶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강력한 국가들의 가차 없는 힘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라고 말한다.
전체와 집단의 이익을 내세워 개인을 억누르고 자유를 말살하려는 세력은 그 정도는 약해졌을지언정 모습을 달리해 세계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가 오래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후대 독자들이 '삶과 운명' 같은 작품을 여전히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러시아문학자인 최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가 명확한 한국어로 옮기고 상세한 각주를 붙였다.
창비. 전 3권. 각 권 432~504쪽. /연합뉴스
1959년 완성해 1980년 스위스서 첫 출간…전체주의에 관한 정교한 초상화 러시아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1905~1964)은 2차대전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 있던 종군기자였다.
폐결핵을 앓은 데다 도수 높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서 무기라고는 손에 쥐어본 적도 없던 소련의 유대계 청년 작가 그로스만은 독일-소련 전쟁이 시작되자 자원입대해 붉은 군대의 종군기자가 된다.
1941년 8월부터 전선에서 신문 '붉은 별'에 전투 기록을 연재하기 시작한 그로스만은 이후 1천일 이상 전장에 체류하면서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심경을 자세히 기록한다.
특히 그는 1942년 남부전선군에 몸담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했다.
나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를 포위한 뒤 벌어진 약 6개월간의 전투는 2차대전의 전투 중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됐다.
그전까지 연합군은 나치 독일의 파죽지세에 계속 밀리다가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소련 승리를 계기로 비로소 승기를 잡았지만,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이 전투에서만 200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그로스만은 이후 소련군이 폴란드로 진격할 때는 탈환하는 도시로 들어가 트레블링카 등지에서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의 결과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했다.
아울러 소련군의 베를린 함락과 소련군이 전쟁에 패배한 독일인들에게 저지른 만행들까지도 그는 꼼꼼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참혹한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쓴 대하소설이 '삶과 운명'이다.
스탈린이 죽고 난 뒤 해빙기였던 1960년 작가는 출간을 시도했지만 출판 금지 처분에 이어 정보기관 KGB에 원고마저 압수당했다.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하던 '삶과 운명'의 원고는 작가의 사후 10년 뒤에야 마이크로필름으로 비밀리에 찍어둔 사본이 서방으로 전해져 1980년 스위스에서 처음 출간될 수 있었다.
'현대 러시아문학 최고 업적 중 하나'로 칭송받는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 '삶과 운명'이 전 3권으로 최근 국내에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의 번역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삶과 운명'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모티브로 두 전체주의 세력인 나치즘과 스탈린 체제 공산주의 정권의 대중동원, 강제노동, 대학살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소재와 주제 의식, 스케일 면에서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와 비견되기도 하는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독일-소련 전쟁의 스탈린그라드전투를 중심으로 스탈린과 히틀러 치하에서 신음하던 인간의 가혹한 삶과 운명을 매우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은 1942년 가을부터 1943년 봄까지 반년간을 배경으로 모스크바에서 카잔으로 피난 온 물리학자 시트룸과 그 가족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독일과 소련의 수용소를 세 축으로 삼아 전개된다.
이 작품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총체성이다.
작가는 전선의 병사와 후방의 시민들은 물론, 독일군과 소련군 장군들, 양쪽 수용소의 수감자들,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수뇌부에 이르기까지 2차대전에 관계된 모든 종류의 인물을 소설로 소환했다.
각양각색의 인간군상을 통해 작가가 말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폐해와 개인의 위대함이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와 유대인 절멸을 위한 가스실 운용, 스탈린 시대의 가혹한 숙청과 노동교화수용소의 참상, 히틀러와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적 국가권력에 굴종해야만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내면, 히틀러와 스탈린의 심리 상태까지 2차대전의 다양한 측면들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 소설은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정교한 초상화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기념비적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과 더불어 집단과 전체에 대한 개인의 굴종과 그에 따른 개인성의 말살을 탁월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늘 언급돼왔다.
"러시아에 있는 수백만의 시골 이즈바(통나무집) 가운데 서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고유하다.
똑같은 두 인간, 똑같은 두 송이 들장미는 상상할 수 없다…… 삶은 그 고유성과 독특성을 폭력으로 지워 없애려는 곳에서 고사(枯死)한다.
"
소설의 첫 부분인 1부 1장에 나오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작가는 2차대전 와중에 극한의 폭력과 인간성 말살에 직면한 평범한 개인들이 끝까지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잃지 않은 채 행하는 선(善)에 주목한다.
학살을 앞둔 상황에서 어제의 이웃이 오늘은 적이 되어 침을 뱉는 상황에서도 애써 감자 한 알을 나누는 사람들, 자신의 집에 기어들어 온 죽기 직전의 포로를 목숨을 걸고 보살펴 살려내는 우크라이나 노파 등을 통해 그로스만은 한 사람의 삶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강력한 국가들의 가차 없는 힘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라고 말한다.
전체와 집단의 이익을 내세워 개인을 억누르고 자유를 말살하려는 세력은 그 정도는 약해졌을지언정 모습을 달리해 세계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가 오래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후대 독자들이 '삶과 운명' 같은 작품을 여전히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러시아문학자인 최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가 명확한 한국어로 옮기고 상세한 각주를 붙였다.
창비. 전 3권. 각 권 432~504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