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영웅'의 이면, 낯선 진실의 발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유창선의 오십부터 예술
나폴레옹을 그린 작품들을 보며 재해석하는 '영웅의 생애'
예술가가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나폴레옹을 그린 작품들을 보며 재해석하는 '영웅의 생애'
예술가가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지난 6월 28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정기 공연 <레이 첸의 멘델스존과 차이콥스키>의 2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 연주였다. 원래 레이 첸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 기대되었던 연주회였지만, 그날의 찬사는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와 서울시향의 ‘영웅의 생애’로 몰렸다. 그동안 이 곡을 음원으로 혹은 연주회장에서 여러 번 들어봤지만, 이제까지 들었던 것 가운데 가히 최고의 연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트렌코와 서울시향 단원들의 호흡은 훌륭했고 총주의 가슴 벅찬 격정과 서정적인 고독의 선율이 어우러지면서 영웅의 생애 속에 그렇게 다양한 색깔이 담겨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는 끊어지지 않는 여섯 개의 부를 통해 당당한 영웅의 모습, 영웅의 적들, 영웅의 반려자, 전쟁터의 영웅, 영웅의 업적을 차례로 들려준다. 특히 영웅의 고독과 성취를 노래한 마지막 6부는 이제는 세상에서 잊혀진 영웅이 말년에 겪는 고독과 평화로운 안식이 교차하는 아름다운 선율의 극치를 들려준다. 연주가 끝나가면서 소리가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져가고 페트렌코가 팔을 내리지 않고 있던 정적의 시간, 우리 인생의 말년도 영웅처럼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서는 연주 기회도 드문 슈트라우스의 결코 쉽지 않은 교향시를 이렇게 훌륭하게 연주해내다니. 이전부터 해왔던 생각이지만 이제 서울시향의 연주를 듣다 보면 굳이 수십만원씩 지불하고 해외 명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고집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에서 ‘영웅’은 누구일까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슈트라우스가 스스로를 영웅으로 여기고 만들었다는 해석은 작곡가의 과도한 자기의식이라는 비판을 낳기도 했다. 실제로 곡의 제5부 ‘영웅의 업적’에서는 슈트라우스 자신이 작곡했던 교향시 ‘돈 후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과 변용’, ‘돈키호테’의 주제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정작 슈트라우스는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전쟁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라며 그런 해석을 소극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니 ‘영웅’이 누구인가는 이 교향시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베토벤의 대표적 걸작인 교향곡 3번 ‘영웅’에서도 사람들은 영웅이 누구인가를 묻곤 한다. 나폴레옹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실현해줄 것이라고 베토벤이 기대하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기에 3번 교향곡에서의 영웅은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1804년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을 보고는 극도로 분노했고, 당초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이 곡을 자신의 후원자인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헌정했다.
베토벤 연구의 권위자인 록우드에 따르면 1804년 8월 26일 베토벤은 출판업자에게 “교향곡 제목은 ‘보나파르트’”라고 알렸다. 그러나 속표지가 훼손된 유명한 악보에 보면 ‘제목 보나파르트’라는 말이 완전히 지워져서 페이지에 구멍이 나 있었다는 것이다. (루이스 록우드, 『베토벤 심포니』) 이는 나폴레옹에 대한 베토벤의 환멸이 이 시기에 극적으로 증대된 징표로 해석된다. 록우드는 베토벤 교향곡 3번의 제목과 부제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보다 넓게 이상적이고 신화적인 인물을 가리킨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는 견해를 밝힌다. 실제로 곡을 들어보면 2악장에서 장송 행진곡을 차용한 비극적인 선율이 나오는데, 나폴레옹이라는 자신의 영웅은 이제 죽었다는 베토벤의 마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록우드의 해석처럼, 베토벤 교향곡 3번의 영웅을 특정 인물로 한정하기보다는 앞으로 전진하려는 인류의 영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베토벤의 정신에 맞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폴레옹 얘기가 나오면 그를 영웅화하는 그림들을 그렸던 자크 루이 다비드를 빼놓을 수 없다. 원래 프랑스 혁명 초기에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 자코뱅당에 참여하여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화가였다. 잘 알려진 <마라의 죽음>(1793)은 암살당한 마라를 혁명을 위해 희생당한 영웅의 모습으로 부각하면서 당시 민중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혁명의 분위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이후 다비드도 감옥에 갇히는 등 수난을 겪다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그의 공식적인 궁정화가로 활약하게 된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제정(帝政)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비드에게 4개의 초대형 그림 제작을 명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다. 1804년 12월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의 장면을 보면 교황 비오 7세가 앉아있는 가운데 나폴레옹 황제는 월계관을 쓰고 앞으로 나와서 황후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원래 황제 대관식은 교황이 황제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것인데 그림에서는 나폴레옹이 월계관을 쓰고는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여기에는 나폴레옹 권력이 교황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황제임을 부각하려는 다비드의 의도가 깔려있다. 다비드는 이보다 앞서 이미 나폴레옹을 영웅화하기 위한 비현실적인 그림들을 그렸으니, 그 대표작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이다. 이 작품은 1800년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알프스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해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알프스산맥을 백마를 타고 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백마를 타고 빨간 망토를 걸친 나폴레옹은 하늘을 찌를 듯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나이조차 구분하기 어렵게 힘찬 모습이다. 그 뒤편으로 걸어서 산맥을 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허구성은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건너는 보나파르트>(1850)에 의해 폭로되고 현실 속의 나폴레옹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들라로슈의 그림에서는 나폴레옹이 노새를 타고 알프스산맥을 넘고 있다. 노새의 발걸음은 무척 느려 보이고 나폴레옹의 얼굴은 여러 생각에 잠겨있는 가라앉은 표정이다. 힘차게 단숨에 넘는 것이 아니라 힘들게 오르고 있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들라로슈는 그렸다. 들라로슈는 다비드가 과장했던 나폴레옹의 실체를 그려버린 것이다. 다비드는 이보다 앞선 1786년에도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영웅화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다비드는 죽음의 순간에도 진정한 철학자의 삶에 대해 논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와 슬픔에 젖어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내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철학자의 삶에 대해 동료들에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크리톤은 바로 옆에 앉아 소크라테스를 슬프고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그토록 존경했던 제자 플라톤은 침대 왼쪽 끝에 걸터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다. 벽에 기대어 비통해하는 동료들도 있고, 멀리 복도에는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를 간수들이 부축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비드는 왜 직접 보지도 못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이렇게 그려냈을까.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 미술계를 풍미했던 신고전주의의 거장 다비드는 특히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대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여러 그림을 그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순교자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대화편’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역사 속에 남겼다면, 다비드는 그림을 통해 그를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인물로 살려냈다.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인물을 영웅으로 만드는 예술작품들은 적지 않다. 우리의 경우도 <건국전쟁>, <문재인입니다>, <노무현입니다> 같은 전직 대통령들에 관한 영화들에서 이들의 정치적 과오는 배제하고 영웅으로서의 모습만 부각하는 시도를 흔히 접했다. 그러나 영웅 만들기와 정반대의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브레히트의 희곡 『부상당한 소크라테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나온다. 철학자의 자존을 위해 독배를 들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전쟁터에서 오직 생존에 급급하여 잔꾀를 부리는 가난한 철학자로 묘사된다. 적군이 오자 소크라테스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다가 선인장 가시에 발을 찔린다. 놀란 그는 적군을 향해 얼떨결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그 얘기를 잘못 전해 들은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칭송하며 열광한다. 소크라테스는 차마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안티스테네스, 알키비아데스 그리고 아내 크산티페 앞에서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고백한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와 같은 조작된 영웅적 모습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일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도주했다는 것을 솔직히 밝히는 일이었다. 탈영병이 된 소크라테스라니. 브레히트가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이며 사실적인가.
루쉰의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실린 단편 소설 「고사리를 캔 이야기」에서는 천도(天道)를 거스른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 굶어 죽었다는 전설적인 현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신화를 해체한다. 이 작품에서 백이와 숙제는 부끄럽게 사느니 굶어 죽기를 택한 지조와 절개의 인물이 아니라, 애당초 굶어 죽을 생각이 없었기에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을 악착같이 찾아가서 날마다 고사리를 뜯는 인물로 나온다. 조리법도 다양해져서 고사리 탕, 고사리 죽, 고사리 장, 맑게 삶은 고사리, 고사리 싹탕, 풋고사리 말림 등을 해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나온다.
그러다가 굶어 죽게 생긴 두 사람을 본 하느님이 암사슴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젖을 먹이도록 한다. 그런데 백이・숙제는 사슴 젖을 먹으면서 속으로 딴생각을 품는다. ‘이 사슴이 이렇게 포동포동하니 잡아먹으면 그만일 거야.’ 그래서 슬그머니 팔을 뻗어 돌을 움켜쥐려 했다. 그러자 사슴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하느님도 그들의 탐욕이 밉살스러워서, 암사슴에게 이제부터는 젖을 주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백이・숙제는 고사리도 먹지 못하고 사슴 젖도 먹을 수 없게 되어 죽고 만다. 지조와 절개의 전설 속 인물들이 사슴을 잡아먹으려던 탐욕스러운 인물로 표현되는 신화의 해체를 루쉰은 이루어낸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개봉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나폴레옹>에서는 여인 앞에서 유약하기만 했던 나폴레옹이 나온다. 일찍이 막스 갈로가 ‘불멸의 인간’이라고 표현했던 나폴레옹은 조제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게 묘사된다. 한눈에 반한 조제핀과 결혼을 하고 이집트 원정 전쟁을 갔다가도 그녀의 불륜 소식을 듣고는 전쟁을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황당한 장군이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불륜 사실을 알고서도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남자, 조제핀의 불임으로 후계자 문제 때문에 이혼하지만 계속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영화 속에 나오는 나폴레옹은 조제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남자로 나온다.
기존의 통념이 아닌 자기 해석대로 인물을 표현하곤 하는 감독인 리들리 스콧은 나폴레옹을 영웅이 아닌 평범하고 나약한 한 인간으로 그리려 했다. 애당초 리들리 스콧이 담으려 했던 것은 ‘영웅 나폴레옹’도 '역사 속 인간'도 아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프랑스에서는 자신들의 영웅을 비루한 존재로 그린 이 영화를 ‘역사를 왜곡한 반프랑스적 영화’라고 비판했을까. 우리가 영웅들을 비틀어 버리고 희화화하는 작품들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기존의 예술작품들에서 과도화된 영웅 만들기가 계속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예술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영웅을 만들 수도 있고, 영웅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림에 대해 취했던 태도는 한 번쯤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교회의 주문에 쿠르베는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천사를 그려주겠소.” 쿠르베는 사상이나 관념에 따라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느낀 것만을 그렸다. 예술가가 자유로운 영혼이려면 자신이 생각하는 영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유창선 문화평론가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는 끊어지지 않는 여섯 개의 부를 통해 당당한 영웅의 모습, 영웅의 적들, 영웅의 반려자, 전쟁터의 영웅, 영웅의 업적을 차례로 들려준다. 특히 영웅의 고독과 성취를 노래한 마지막 6부는 이제는 세상에서 잊혀진 영웅이 말년에 겪는 고독과 평화로운 안식이 교차하는 아름다운 선율의 극치를 들려준다. 연주가 끝나가면서 소리가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져가고 페트렌코가 팔을 내리지 않고 있던 정적의 시간, 우리 인생의 말년도 영웅처럼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서는 연주 기회도 드문 슈트라우스의 결코 쉽지 않은 교향시를 이렇게 훌륭하게 연주해내다니. 이전부터 해왔던 생각이지만 이제 서울시향의 연주를 듣다 보면 굳이 수십만원씩 지불하고 해외 명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고집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에서 ‘영웅’은 누구일까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슈트라우스가 스스로를 영웅으로 여기고 만들었다는 해석은 작곡가의 과도한 자기의식이라는 비판을 낳기도 했다. 실제로 곡의 제5부 ‘영웅의 업적’에서는 슈트라우스 자신이 작곡했던 교향시 ‘돈 후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과 변용’, ‘돈키호테’의 주제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정작 슈트라우스는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전쟁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라며 그런 해석을 소극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니 ‘영웅’이 누구인가는 이 교향시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베토벤의 대표적 걸작인 교향곡 3번 ‘영웅’에서도 사람들은 영웅이 누구인가를 묻곤 한다. 나폴레옹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실현해줄 것이라고 베토벤이 기대하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기에 3번 교향곡에서의 영웅은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1804년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을 보고는 극도로 분노했고, 당초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이 곡을 자신의 후원자인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헌정했다.
베토벤 연구의 권위자인 록우드에 따르면 1804년 8월 26일 베토벤은 출판업자에게 “교향곡 제목은 ‘보나파르트’”라고 알렸다. 그러나 속표지가 훼손된 유명한 악보에 보면 ‘제목 보나파르트’라는 말이 완전히 지워져서 페이지에 구멍이 나 있었다는 것이다. (루이스 록우드, 『베토벤 심포니』) 이는 나폴레옹에 대한 베토벤의 환멸이 이 시기에 극적으로 증대된 징표로 해석된다. 록우드는 베토벤 교향곡 3번의 제목과 부제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보다 넓게 이상적이고 신화적인 인물을 가리킨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는 견해를 밝힌다. 실제로 곡을 들어보면 2악장에서 장송 행진곡을 차용한 비극적인 선율이 나오는데, 나폴레옹이라는 자신의 영웅은 이제 죽었다는 베토벤의 마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록우드의 해석처럼, 베토벤 교향곡 3번의 영웅을 특정 인물로 한정하기보다는 앞으로 전진하려는 인류의 영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베토벤의 정신에 맞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폴레옹 얘기가 나오면 그를 영웅화하는 그림들을 그렸던 자크 루이 다비드를 빼놓을 수 없다. 원래 프랑스 혁명 초기에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 자코뱅당에 참여하여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화가였다. 잘 알려진 <마라의 죽음>(1793)은 암살당한 마라를 혁명을 위해 희생당한 영웅의 모습으로 부각하면서 당시 민중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혁명의 분위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이후 다비드도 감옥에 갇히는 등 수난을 겪다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그의 공식적인 궁정화가로 활약하게 된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제정(帝政)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비드에게 4개의 초대형 그림 제작을 명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다. 1804년 12월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의 장면을 보면 교황 비오 7세가 앉아있는 가운데 나폴레옹 황제는 월계관을 쓰고 앞으로 나와서 황후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원래 황제 대관식은 교황이 황제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것인데 그림에서는 나폴레옹이 월계관을 쓰고는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여기에는 나폴레옹 권력이 교황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황제임을 부각하려는 다비드의 의도가 깔려있다. 다비드는 이보다 앞서 이미 나폴레옹을 영웅화하기 위한 비현실적인 그림들을 그렸으니, 그 대표작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이다. 이 작품은 1800년 나폴레옹이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알프스산맥을 넘었던 사건을 기념해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알프스산맥을 백마를 타고 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백마를 타고 빨간 망토를 걸친 나폴레옹은 하늘을 찌를 듯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나이조차 구분하기 어렵게 힘찬 모습이다. 그 뒤편으로 걸어서 산맥을 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허구성은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건너는 보나파르트>(1850)에 의해 폭로되고 현실 속의 나폴레옹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들라로슈의 그림에서는 나폴레옹이 노새를 타고 알프스산맥을 넘고 있다. 노새의 발걸음은 무척 느려 보이고 나폴레옹의 얼굴은 여러 생각에 잠겨있는 가라앉은 표정이다. 힘차게 단숨에 넘는 것이 아니라 힘들게 오르고 있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들라로슈는 그렸다. 들라로슈는 다비드가 과장했던 나폴레옹의 실체를 그려버린 것이다. 다비드는 이보다 앞선 1786년에도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영웅화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다비드는 죽음의 순간에도 진정한 철학자의 삶에 대해 논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와 슬픔에 젖어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내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철학자의 삶에 대해 동료들에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크리톤은 바로 옆에 앉아 소크라테스를 슬프고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그토록 존경했던 제자 플라톤은 침대 왼쪽 끝에 걸터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다. 벽에 기대어 비통해하는 동료들도 있고, 멀리 복도에는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를 간수들이 부축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비드는 왜 직접 보지도 못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이렇게 그려냈을까.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 미술계를 풍미했던 신고전주의의 거장 다비드는 특히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대중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여러 그림을 그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순교자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대화편’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역사 속에 남겼다면, 다비드는 그림을 통해 그를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인물로 살려냈다.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인물을 영웅으로 만드는 예술작품들은 적지 않다. 우리의 경우도 <건국전쟁>, <문재인입니다>, <노무현입니다> 같은 전직 대통령들에 관한 영화들에서 이들의 정치적 과오는 배제하고 영웅으로서의 모습만 부각하는 시도를 흔히 접했다. 그러나 영웅 만들기와 정반대의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브레히트의 희곡 『부상당한 소크라테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나온다. 철학자의 자존을 위해 독배를 들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전쟁터에서 오직 생존에 급급하여 잔꾀를 부리는 가난한 철학자로 묘사된다. 적군이 오자 소크라테스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다가 선인장 가시에 발을 찔린다. 놀란 그는 적군을 향해 얼떨결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그 얘기를 잘못 전해 들은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칭송하며 열광한다. 소크라테스는 차마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안티스테네스, 알키비아데스 그리고 아내 크산티페 앞에서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고백한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와 같은 조작된 영웅적 모습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일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도주했다는 것을 솔직히 밝히는 일이었다. 탈영병이 된 소크라테스라니. 브레히트가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이며 사실적인가.
루쉰의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실린 단편 소설 「고사리를 캔 이야기」에서는 천도(天道)를 거스른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 굶어 죽었다는 전설적인 현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신화를 해체한다. 이 작품에서 백이와 숙제는 부끄럽게 사느니 굶어 죽기를 택한 지조와 절개의 인물이 아니라, 애당초 굶어 죽을 생각이 없었기에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을 악착같이 찾아가서 날마다 고사리를 뜯는 인물로 나온다. 조리법도 다양해져서 고사리 탕, 고사리 죽, 고사리 장, 맑게 삶은 고사리, 고사리 싹탕, 풋고사리 말림 등을 해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나온다.
그러다가 굶어 죽게 생긴 두 사람을 본 하느님이 암사슴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젖을 먹이도록 한다. 그런데 백이・숙제는 사슴 젖을 먹으면서 속으로 딴생각을 품는다. ‘이 사슴이 이렇게 포동포동하니 잡아먹으면 그만일 거야.’ 그래서 슬그머니 팔을 뻗어 돌을 움켜쥐려 했다. 그러자 사슴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하느님도 그들의 탐욕이 밉살스러워서, 암사슴에게 이제부터는 젖을 주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백이・숙제는 고사리도 먹지 못하고 사슴 젖도 먹을 수 없게 되어 죽고 만다. 지조와 절개의 전설 속 인물들이 사슴을 잡아먹으려던 탐욕스러운 인물로 표현되는 신화의 해체를 루쉰은 이루어낸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개봉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나폴레옹>에서는 여인 앞에서 유약하기만 했던 나폴레옹이 나온다. 일찍이 막스 갈로가 ‘불멸의 인간’이라고 표현했던 나폴레옹은 조제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게 묘사된다. 한눈에 반한 조제핀과 결혼을 하고 이집트 원정 전쟁을 갔다가도 그녀의 불륜 소식을 듣고는 전쟁을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황당한 장군이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불륜 사실을 알고서도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남자, 조제핀의 불임으로 후계자 문제 때문에 이혼하지만 계속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영화 속에 나오는 나폴레옹은 조제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남자로 나온다.
기존의 통념이 아닌 자기 해석대로 인물을 표현하곤 하는 감독인 리들리 스콧은 나폴레옹을 영웅이 아닌 평범하고 나약한 한 인간으로 그리려 했다. 애당초 리들리 스콧이 담으려 했던 것은 ‘영웅 나폴레옹’도 '역사 속 인간'도 아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프랑스에서는 자신들의 영웅을 비루한 존재로 그린 이 영화를 ‘역사를 왜곡한 반프랑스적 영화’라고 비판했을까. 우리가 영웅들을 비틀어 버리고 희화화하는 작품들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기존의 예술작품들에서 과도화된 영웅 만들기가 계속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예술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영웅을 만들 수도 있고, 영웅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림에 대해 취했던 태도는 한 번쯤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교회의 주문에 쿠르베는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천사를 그려주겠소.” 쿠르베는 사상이나 관념에 따라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느낀 것만을 그렸다. 예술가가 자유로운 영혼이려면 자신이 생각하는 영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유창선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