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현지시간) 내전으로 폐허가 된 예멘 서부 알 호데이다주 알 코카 지역에서 한 농부가 대추야자를 따고 있다. /AFP
지난 2일(현지시간) 내전으로 폐허가 된 예멘 서부 알 호데이다주 알 코카 지역에서 한 농부가 대추야자를 따고 있다. /AFP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에 대비하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식량 가격 변동을 '일시적 현상'으로 취급해왔지만 이상기후로 인해 농산물 가격 상승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으면서다. 농산물 등의 가격 변동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앞으로는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밀 수학 줄이는 폭염, 16배 자주 온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3일(현지시간) "기후 변화가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을 유발하기 시작하면서 금리 결정자들이 식량 가격 상승의 영향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포츠담 기후영향연구소는 향후 10년 이내에 기온 상승으로 식량 물가 상승률이 최대 연 3.23%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고 지난 5월 전망했다. 1996년부터 2021년까지 121개국 데이터를 인용해 미래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를 그려본 결과다. 전체 물가는 최대 연 1.18%포인트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급격한 기온 상승이 재배지 환경을 뒤바꿔 작물 생산량을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가령 밀은 봄철 기온이 27.8℃를 넘기면 수확량이 급감한다. 최근 수확량이 급감하는 수준의 폭염은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추세다. 미국 터프츠대학교 프리드먼 영양과학·정책 대학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81년 기준 100년에 한 번 일어나던 폭염은 이제 미국 중서부에서는 6년에 한 번, 중국 북동부에서는 16년에 한 번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지역에서 농부가 수확한 밀을 확인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며 급등한 밀 가격은 올해 들어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로이터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지역에서 농부가 수확한 밀을 확인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며 급등한 밀 가격은 올해 들어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로이터
쌀·대두·옥수수·감자 등 주요 농산물도 마찬가지다. 일본 국립농식품연구소 소속 토시히로 하세가와 박사 등은 2022년 연구를 통해 최악의 기후 위기 시나리오에서 밀 수확량이 이번 세기 말까지 약 20% 감소한다고 내다봤다. 옥수수 수확량은 16%, 대두와 쌀은 각각 10%, 9% 줄어든다. 프리드리케 쿠익 ECB 이코노미스트는 "작물에 따라 20~30℃까지는 생산성이 꽤 안정적이지만 그 이상에서는 급격한 하락세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가뭄·폭풍·홍수 등 더욱 빈번해지는 기후 재난 역시 농산물 공급에 악재다. 전 세계 최대 코코아 생산지인 아프리카 가나·코트디부아르에 지난해 여름 발생한 폭우는 대표 사례다. 습해진 기후에 전염성 곰팡이병인 검은꼬투리병이 번성했고 지난해 4월 코코아 가격은 역대 최고치인 톤(t)당 1만2000달러대를 돌파했다.

식량 뺀 근원CPI 의미 없어지나

식량 가격 상승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벌이는 각국 중앙은행에도 중대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례적으로 발생했던 식량 가격 급변이 이제는 상수가 되면서다.

각국 중앙은행은 일반적으로 물가 지표를 헤드라인 인플레이션과 근원 인플레이션 두 가지로 나눠 발표한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월별 CPI를 근원CPI와 별도로 내놓고 있다. 근원CPI는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품 가격을 제외한 물가의 변동을 나타낸다. 근원CPI를 나눈 것은 단기적으로 요동치는 유가·식료품 가격 등의 변수를 제거해 일관된 물가 추이를 보자는 취지에서다.

데이비드 바메스 런던정경대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정책 연구원은 이러한 접근 방식이 "(식량) 가격 충격이 반복돼 헤드라인 인플레이션에 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경우 유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거트 피어스만 벨기에 겐트대학교 경제학 교수는 중기적으로 유로존(유로 사용 20개국) 인플레이션 변동성의 최대 30%가 국제 식량 가격 충격으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신흥국에는 식량 가격이 전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식료품에서 가계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엥겔 지수)이 더 높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노이만 HSCB 아시아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저소득 국가에서는 밀이 빵 가격의 70%를 차지하는 반면 고소득 국가에서는 노동력·에너지·운송비가 더 중요해 그 비율이 10%에 불과할 수 있다"라며 "식품 CPI 자체도 투입 가격의 혼란과 변동에 훨씬 더 민감하다"고 진단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