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클락 감독이 AI기술로 연출한 '어나더' 스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경쟁 부문에 출품됐다. /BIFAN
데이브 클락 감독이 AI기술로 연출한 '어나더' 스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경쟁 부문에 출품됐다. /BIFAN
인공지능(AI)에 대한 문화·예술인들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에 AI가 개입할 경우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7월 미국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배우와 감독, 작가들이 “AI가 영화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짜깁기 데이터로 창의성이 해친다”며 선언한 파업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런 영화판에서 AI의 위상이 사뭇 달라졌다. 실사 촬영에 생성 AI 프로그램으로 만든 이미지를 더한 하이브리드 영화가 탄생하면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백 투 더 퓨처’를 연출한 거장 로버트 저메키스가 올해 선보일 신작 ‘히어’에서 AI기술로 주연 톰 행크스의 젊은 시절을 연출한 게 대표적.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의 빌런(Villain·악당) 타노스 같은 취급을 받던 AI가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도 있는 존재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영화감독 데이브 클락. /BIFAN
미국의 영화감독 데이브 클락. /BIFAN
AI가 영화의 새로운 장(章)을 열 수 있을까. 과연 배우는 물론 카메라 하나 없이 AI 기술만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에서도 이런 물음을 던지는 영화인이 부쩍 늘었다. 이 해답을 위해 국내 대표 장르영화제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가 미국 영화감독인 데이브 클락(40)을 한국으로 초대했다. 미국의 AI 영화·영상 제작자들의 커뮤니티인 ‘큐리어스 레퓨지’의 대표 감독으로, AI 영화 제작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영화인이다. 지난 3일 경기 부천 웹툰융합센터에서 열린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에서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의 멘토로 나선 그를 만나 AI 영화의 미래를 물었다.

▷AI영상언어의 원어민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이 분야에 일찍 발 들였어요. 계기가 궁금합니다.
“예술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데이터 중심 기업인 HP(휴렛팩커드), 인텔 같은 기업에 일했던 터라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술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법을 배웠어요. 부유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느라 영화 제작용 카메라도 없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스트리트필름을 만든 적도 있는데요. AI 기술이 발달하면서 자본이 없어도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기회를 얻은 거죠.”

▷생성 AI 기술이 영화계에 기회의 평등을 줬다는 뜻인가요.
“시대극이나 공포 장르 영화를 예로 들면요, 10년 전 할리우드에선 신인 감독이 구상한 이런 콘셉트나 시나리오를 투자자들에게 피칭(아이디어 소개)하게 되면 ‘신인이 이런 수준의 영화는 불가능해요. 당신은 스필버그가 아니에요’란 답을 듣기 일쑤였어요. 지금은 AI 프로그램을 사용해 2~3분짜리 단편 영상으로 만들어 직접 보여줄 수 있어요. 젊은 감독도 ‘이런 영화 놓치면 당신들 손해인걸요’라고 할 수 있게 된 거죠. 일부 엘리트에 국한됐던 독창적인 블록버스터를 만들 기회가 다른 사람에게도 돌아가게 됐다고 할까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경쟁부문에 나온 권한슬 감독의 '원 모어 펌킨' 스틸. /BIFAN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경쟁부문에 나온 권한슬 감독의 '원 모어 펌킨' 스틸. /BIFAN
▷AI로 만든 영화의 장점이 무엇인가요.
“효율적인 예산절감이죠. 저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지만, 스토리를 구상하고 챗GPT나 클라우드AI 같은 도구를 사용하기도 해요. 그럼 보통 6개월이 걸리는 초고 완성을 단 일주일로 줄일 수 있어요. 또 다른 난관이 영화를 만들 때 너무 많은 제작비가 필요하단 거잖아요. AI기술을 활용하면 마블의 ‘어벤져스’ 같은 영화를 반값에 만들 수 있고, 1년에 2~3편이 아니라 12편도 만들 수 있어요. CG를 입히지 않아도 우주 공간, 화산 내부, 심해 등 카메라 촬영이 불가한 상상 속 모든 장면을 만들 수 있죠.”

▷AI기술에 대한 우려도 커요.
“어떤 관점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아요. 생성AI는 최근 1년간 다른 기술 10~20년 치에 달하는 발전을 이뤄냈어요. 전례 없는 속도에 다양한 영화 조합에선 직업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해요. 그런데 앉아서 변화를 바라만 보는 것 보단, 기술혁신의 배를 직접 몰고 AI를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미국감독조합에 가입할 때도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땐 생성형 AI를 사용해 영화를 제작하는 행위 자체를 할리우드에선 터부(taboo·금기)로 여겼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은 영화인이 AI 기술을 수용해 영화적 실험을 하고 있죠. 이런 변화를 발판 삼아 점점 AI 영화제작도 확산할 거라 봐요.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방식에 AI를 융합할 거고요. 아마 1년 내 100%로 AI 기술로 만든 영화가 개봉할 거라 생각합니다.”
지난 3일 경기 부천 웹툰융합센터에서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에서 데이브 클락 감독이 참가자들의 멘토링을 하는 모습. /BIFAN
지난 3일 경기 부천 웹툰융합센터에서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AI 필름 메이킹 워크숍'에서 데이브 클락 감독이 참가자들의 멘토링을 하는 모습. /BIFAN
▷AI 영화가 정착하기까지 난관이 있다면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영화를 떠올리면 될 것 같아요. 영화 ‘아바타’는 모두가 CG인 걸 알지만 가짜라고 하진 않죠. 결국 중요한 건 소재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얼마 전 개봉한 ‘인사이드 아웃2’를 그저 애니메이션이라 보지 않는 것처럼요. 저는 AI영화가 지금은 서브 장르지만, 궁극적으론 ‘영화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해요.”

▷AI 영화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초상권이나 목소리 권리 침해 우려도 여전해요.
“인간이 창조한 서사, 인물, 구성을 갖고 AI가 시각화했다면 기본적으로 창조자에게 저작권이 귀속돼야 한다고 봐요. 어떤 배우의 모습을 본떠 이미지를 만들었다면 초상권이 지불돼야 한다고도 생각해요.”
데이브 클락 감독이 AI 기술을 활용해 연출한 영화 '어나더' 스틸컷. /BIFAN
데이브 클락 감독이 AI 기술을 활용해 연출한 영화 '어나더' 스틸컷. /BIFAN
▷어머니가 한국인인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한국 음식도 좋아하고, 한국계 미국인이라 한국적 장르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몇 년 전 경북 봉화에서 광부들이 땅속에 갇혀 있다가 커피믹스로 버티며 생환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봉화 아래에서’란 영화를 제작할 계획입니다. AI로 호러적 요소를 더하고 철을 먹는 불가사리라는 한국 전통 요소도 가미하려 해요.“

▷한국 영화인들과 해보고 싶은 작업도 있을까요?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됐어요. (영화를 연출한) 박찬욱 감독님이 제가 영화를 시작한 계기인 거죠. 송중기의 팬이기도 해요. 드라마에서 활약하는 걸 봤는데, 호러 같은 장르적 크로스오버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또 현빈이나 이민호, 이창동 감독님과도 작업을 해보고 싶네요.”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