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
고두현

금산산장 노할머니
일흔여덟,
바둑판 같은 생 펼치고
오목을 놓으시네.

가고 싶은 길 참 많았제,
못 가는 길 더 많았지만.

서울서 내려온 딸이
어머니, 그쪽은 절벽이에요
오냐 그러면 이렇게 놓제.

길은 미끄럽기도 하고 굽어졌다 펴지기도
하면서 바둑판을 몇 굽이째 도는데
세상의 모든 길이 흑 아니면 백,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 따라
바둑돌은 저희끼리 잘그락거리며
몸을 부딪네.

밖에는 먼 길 가는 산꿩들
다섯 발자국씩
총, 총, 총, 총, 총
점을 찍고

노할머니 딸네 둘이
첩첩 산 골짜기마다
오 촉짜리 등불을 켜 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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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산장에서 보낸 며칠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남해 금산 꼭대기에 산장이 하나 있습니다. 지은 지 100년도 넘은 금산산장입니다. 보리암에서 산길로 5분 정도 거리에 있지요.

오래전 그곳에서 혼자 1주일을 지낼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장에서 며칠 동안 자기 시간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당일치기 등산이나 하룻밤 자는 둥 마는 둥 쫓기듯 내려오는 산행과는 애초부터 격이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여태까지 몰랐던 숲속 나무들의 체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맑은 물을 떠 청량하게 세수하는 기분 또한 묘미였지요.

산장에서 이틀째를 맞은 날, 저녁을 먹고 일어나는데 여든이 다 되어가는 주인 할머니가 바둑판을 펼칩니다. 아니 웬 바둑? 의아하게 바라보았더니 옆에 있던 환갑 나이의 딸이 바둑통을 챙기며 대답합니다. “자꾸 정신이 흐려진다고 해서…. 오목을 두면 그나마 머리를 쓰게 되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해서요.”

노할머니와 환갑에 가까운 딸네가 마주 앉아 밤늦도록 오목을 두는 모습이라니! 저도 곁에 앉아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열어주기도 하면서 긴 밤을 한 칸씩 밝혀나갔습니다. 그들이 지나온 세상의 길이 바둑판 위에 함께 펼쳐졌지요.

나이테는 바둑판의 눈금에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도 수많은 나이테가 주름 잡혀 있습니다.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한 일도 많았을 것이고, 가기 싫은 길을 지나기도 했을 테지요.

산에서 보내는 밤은 그 길처럼 깊고 적막했습니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이 오목을 두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지요.

저는 그 풍경화 속에다 산골짜기마다 하나씩 켜지는 등불을 그려 넣고 싶었습니다. 오 촉짜리 전구알 같은 불빛을 받으며, 산꿩들이 총, 총, 총, 총, 총 발자국을 찍으며 먼 길 가는 모습도 그림 한 편에 옮겨놓고 싶었지요.

그 장면이 생생하게 눈에 어립니다. 다시금 금산산장에 가고 싶어집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