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저들보다 더 나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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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전체주의의 폭압과 세뇌
조지 오웰의 '1984' 현실판
영혼 없는 '잿빛 사회' 실상 눈감고
찬양하는 '진보 인사' 적지 않아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해야
최소한의 '인간 조건' 갖출 수 있어
이응준 시인·소설가
조지 오웰의 '1984' 현실판
영혼 없는 '잿빛 사회' 실상 눈감고
찬양하는 '진보 인사' 적지 않아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해야
최소한의 '인간 조건' 갖출 수 있어
이응준 시인·소설가
2009년 출간된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에는 다음과 같은 일부 내용이 나온다. 남한이 북한을 흡수 통일한 통일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북한 출신 인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체주의적 트라우마’에서 ‘완전하게는’ 벗어나질 못한다. 북한군 장교였던 주인공 리강은 김일성의 미라를 참배하며 펑펑 눈물을 흘렸더랬다. 통일 뒤 서울에서 조직폭력배로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도 예컨대 아직도 김일성의 사진을 우연히 마주하면 문득 경배해야만 할 거 같고, 김일성의 기일(忌日)인 7월 8일 아침에 눈을 뜨면 종일 괜히 우울했으며 4월 15일 태양절(김일성 생일)에는 은근히 경건해졌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모태신앙’의 후유증이었다.
특정 거짓과 폭력, 이미지와 상징체계에 지배당하던 사람들은 그것들이 사기라고 판명난들 동일한 신호와 자극이 오면 어쨌든 반응한다. 조건반사는 개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조건반사는 인간의 영혼 안으로 들어오면 확장하고 심오해진다. 부화(孵化)된 뒤 줄곧 새장에 갇힌 새를 푸른 하늘에 놓아줘도 그 새의 내면은 여전히 새장 속에 있다. 심지어 어떤 새들은 제 날개를 짐짝처럼 여긴 채 아예 날지 않고 걸어다닌다. 이런 ‘병맛 비극(tradegy)’에는 자각능력이 없다.
<국가의 사생활>을 집필하면서 나는 많은 연구와 조사를 했지만 기실 저 부분은 내 상상으로 쓴 거였다. 나중에 한 탈북자 독자가,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다소간 차이가 있을지언정 정말로 저런 증상을 겪곤 한다는 얘기를 해줬을 때, 작가로서 기쁘기보다는 인간으로서 침울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러시아 감독 비탈리 만스키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 아래’는 2015년 10월 29일 라이프치히에서 최초 상영됐다. 촬영이 시작되자 북한 당국은 ‘모든 것들’을 조작했고 비탈리 감독은 그들이 ‘그러는 짓들’까지 카메라에 ‘몰래’ 담았다. 8살 소녀 ‘리진미’가 주인공인 북한판 ‘트루먼 쇼’라고 보면 된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건 북한 당국에는 검열본을 제출하고 감독본은 목숨을 걸고 밀반출했기 때문이다. 김씨 왕조 우상화와 북한체제 세뇌에 찌든 평양은 핏기 없는 인형인간들이 움직이는 잿빛도시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완벽히’ 실현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 아니라 과거와 오늘의 북한이다. 진미는 소녀로서는 감당키 힘든 여러 일들을 수행하는데 그건 다른 모든 북한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고문(拷問) 같은 고생을 하는 북한 집체공연을 직접 보고는 감탄하던 남한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제 자식도 그 지옥으로 보내 그 짓들을 시켜야 한다. 국회의원에 장관까지 지낸 어느 전직 베스트셀러 시인은 저런 평양의 잿빛을 보고는 “서울이 욕망과 탐욕의 빛이라면 평양의 빛은 그것을 털어내고 담담한 자존심으로 서 있는 승복(僧服)의 빛이다”라며 찬양했다. 이런 역겨운 북한방문기들은 차고 넘친다. 영화의 끝에서 진미는 조선소년단에 가게 돼 무엇이 기대되냐는 질문에 갑자기 조용한 눈물을 흘린다. 통역사가 다시 묻는다. “울지 마요. 대신 좋은 거에 대해 생각해봐요. 응?” “잘 모릅니다.” “전에 있었던 좋거나 기쁜 일을 생각해봐요. 아니면 어떤 시를 생각해봐요.” “시?” 진미는 이걸 시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위대한 김정일 대원수님께서 빛내어주시었으며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평양을 미화했던 그 시인 정치인은 이 소녀의 어두운 눈물과 끔찍한 시에 대해 죄책감이 있을 리 없다.
내 소설의 주인공 리강도 진미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민주화’를 비롯한 온갖 ‘정의로운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규정하는 부류들보다 더 참담한 것은 그 부류들을 무조건 추종하는 대중이다. 좌파니 우파니를 떠나서, 사람이라면 저들의 저런 행위만큼은 비판해야 한다. 자신의 무지와 심리적 쾌락(증오)을 위해 자진해서 섬긴다는 점에서 남한의 대중파시즘은 북한의 이단종교적 독재파시즘보다 더 악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1980년대’에 가스라이팅 당한 채 대체 어떤 조건반사와 ‘트루먼 쇼’에 갇혀 있는 것인가. 우리의 ‘좋은 것’과 사랑의 시는 언제부터 우리 곁을 떠나버린 걸까? 저들의 개가 되어선 안 된다.
특정 거짓과 폭력, 이미지와 상징체계에 지배당하던 사람들은 그것들이 사기라고 판명난들 동일한 신호와 자극이 오면 어쨌든 반응한다. 조건반사는 개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조건반사는 인간의 영혼 안으로 들어오면 확장하고 심오해진다. 부화(孵化)된 뒤 줄곧 새장에 갇힌 새를 푸른 하늘에 놓아줘도 그 새의 내면은 여전히 새장 속에 있다. 심지어 어떤 새들은 제 날개를 짐짝처럼 여긴 채 아예 날지 않고 걸어다닌다. 이런 ‘병맛 비극(tradegy)’에는 자각능력이 없다.
<국가의 사생활>을 집필하면서 나는 많은 연구와 조사를 했지만 기실 저 부분은 내 상상으로 쓴 거였다. 나중에 한 탈북자 독자가,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다소간 차이가 있을지언정 정말로 저런 증상을 겪곤 한다는 얘기를 해줬을 때, 작가로서 기쁘기보다는 인간으로서 침울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러시아 감독 비탈리 만스키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 아래’는 2015년 10월 29일 라이프치히에서 최초 상영됐다. 촬영이 시작되자 북한 당국은 ‘모든 것들’을 조작했고 비탈리 감독은 그들이 ‘그러는 짓들’까지 카메라에 ‘몰래’ 담았다. 8살 소녀 ‘리진미’가 주인공인 북한판 ‘트루먼 쇼’라고 보면 된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건 북한 당국에는 검열본을 제출하고 감독본은 목숨을 걸고 밀반출했기 때문이다. 김씨 왕조 우상화와 북한체제 세뇌에 찌든 평양은 핏기 없는 인형인간들이 움직이는 잿빛도시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완벽히’ 실현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 아니라 과거와 오늘의 북한이다. 진미는 소녀로서는 감당키 힘든 여러 일들을 수행하는데 그건 다른 모든 북한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고문(拷問) 같은 고생을 하는 북한 집체공연을 직접 보고는 감탄하던 남한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제 자식도 그 지옥으로 보내 그 짓들을 시켜야 한다. 국회의원에 장관까지 지낸 어느 전직 베스트셀러 시인은 저런 평양의 잿빛을 보고는 “서울이 욕망과 탐욕의 빛이라면 평양의 빛은 그것을 털어내고 담담한 자존심으로 서 있는 승복(僧服)의 빛이다”라며 찬양했다. 이런 역겨운 북한방문기들은 차고 넘친다. 영화의 끝에서 진미는 조선소년단에 가게 돼 무엇이 기대되냐는 질문에 갑자기 조용한 눈물을 흘린다. 통역사가 다시 묻는다. “울지 마요. 대신 좋은 거에 대해 생각해봐요. 응?” “잘 모릅니다.” “전에 있었던 좋거나 기쁜 일을 생각해봐요. 아니면 어떤 시를 생각해봐요.” “시?” 진미는 이걸 시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위대한 김정일 대원수님께서 빛내어주시었으며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평양을 미화했던 그 시인 정치인은 이 소녀의 어두운 눈물과 끔찍한 시에 대해 죄책감이 있을 리 없다.
내 소설의 주인공 리강도 진미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민주화’를 비롯한 온갖 ‘정의로운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규정하는 부류들보다 더 참담한 것은 그 부류들을 무조건 추종하는 대중이다. 좌파니 우파니를 떠나서, 사람이라면 저들의 저런 행위만큼은 비판해야 한다. 자신의 무지와 심리적 쾌락(증오)을 위해 자진해서 섬긴다는 점에서 남한의 대중파시즘은 북한의 이단종교적 독재파시즘보다 더 악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1980년대’에 가스라이팅 당한 채 대체 어떤 조건반사와 ‘트루먼 쇼’에 갇혀 있는 것인가. 우리의 ‘좋은 것’과 사랑의 시는 언제부터 우리 곁을 떠나버린 걸까? 저들의 개가 되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