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혁 발레리노가 점프하는 장면.  전준혁 제공
전준혁 발레리노가 점프하는 장면. 전준혁 제공
“준혁, 퍼스트 솔리스트로 승급하면 너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 “안 될 이유가 있을까요? (Why not?)”

영국 런던 ‘로열발레단’ 최초의 한국인 발레리노 전준혁(26)이 지난달 말 케빈 오헤어 단장과 나눈 대화다. 그가 솔리스트로 진급한 지 1년밖에 안 된 시점에 들려온 깜짝 승급 소식이다. 1931년 설립된 로열발레단은 유럽에선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과 함께 투톱으로 불린다. 로열발레단 단원 등급은 아티스트부터 시작해 퍼스트 아티스트, 솔리스트, 퍼스트 솔리스트, 수석캐릭터 아티스트, 최고 단계인 수석무용수로 구성돼 있다. 각 단계를 오를 때마다 통상 수년이 걸린다. 중도 하차하는 무용수도 수두룩하다. 단장의 파격 제안은 발레단 전체 분위기를 고려해 매우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와 올 상반기 보여준 기량과 춤에 대한 태도가 훌륭해 ‘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고. 전준혁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하계휴가를 맞아 잠시 한국을 찾은 그를 지난 2일 서울 자양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전준혁은 2014년 아시아인 최초로 로열발레단 산하 발레학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2017년엔 한국인 최초로 발레단원이 됐다. 발레단 산하 교육생이어도 졸업생 30명 중 1~2명만이 입단에 성공하는데, 그는 바늘구멍을 두 번이나 뚫은 셈이다. 로열발레단의 신화가 된 발레리노 필립 말스덴을 모델로 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한국 초연 당시 최종 오디션에 합격했던 그는 ‘한국판 빌리 엘리어트’를 연상시킨다. 전준혁은 “입단 후 7년 동안 더 나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 매일같이 고민했다”고 했다. 퍼스트 솔리스트 진급에 대해서도 주역을 안정적으로 맡을 수 있는 기쁨보다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건넸다.

“앞으로 공연마다 조금 더 ‘비중 있는 역’을 담당하게 될 테니, 무대에 서는 횟수는 그만큼 줄어들 거예요. 퍼스트 솔리스트 직급은 단순히 테크닉이 뛰어나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진심을 다해 캐릭터를 소화해야 하고, 이젠 한 명의 예술가로서 발레단을 대표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져야 하니 기쁜 만큼 부담도 큽니다.”

슬럼프를 겪을 틈이 없었던 그지만 지난 시즌 욕심 나는 배역을 많이 맡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주역의 커버(대타) 역할로 캐스팅돼 기량을 무대에서 보여줄 기회가 적었다는 것. 긴 기다림 끝에 기회가 찾아왔다.

“너무 답답하던 시기에 프레드릭 애슈턴이 안무한 ‘랩소디’에서 주역으로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았어요.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을 현대적인 발레 안무로 재탄생시킨 작품입니다. 동료 무용수가 주역을 포기하면서 드라마처럼 주인공으로 무대에 설 수 있게 됐죠.”

그를 제외한 모든 주역이 1~2주 앞서 맹연습하고 있던 찰나, 첫 리허설에 참여했을 때 승부사적 기질이 발동했다. 주역으로 캐스팅돼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냈다. “본 공연은 오랜 기간 저를 응원해준 객석의 팬들을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어요. 그때의 기분은 뭐라 표현이 안 돼요.”

입단 당시부터 기량은 이미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그가 더 채워야 할 테크닉은 사실 없다. 다만 노련한 무용수일수록 배역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전준혁은 “맞춤법을 틀리는 작가가 없는 것처럼, 테크닉이 부족한 로열발레단원은 없다”며 “배역을 받았을 때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설정하고 나만의 스토리로 동작을 표현해 진실성을 담는다”고 말했다.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지만 로열발레단이 재해석한 버전에선 왕자의 친구인 ‘베노’가 매우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온다. 베노로 분한 그는 왕자에게 말을 거는 마임을 할 때도 마음속으로 구체적인 대사를 건네며 했다고 한다. 로열발레단은 ‘드라마 발레’에 강점이 있다 보니 캐릭터를 표현하는 무용수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를 연기하더라도 무용수마다 각기 다른 로미오가 돼야 할 것”이라며 “예술가라면 고유의 예술성을 자신만의 배역 해석으로 표현해낼 줄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번 승급 소식을 개인 SNS에 한글 손편지로 써서 정성껏 전했다. 다섯 살 때 고모가 운영하는 발레학원에서 일찌감치 꿈을 키워온 그다운 방식이었다. 올 하반기에는 런던으로 돌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비롯해 많은 현대작을 보여줄 계획이다. 캐스팅이 결정된 작품도 이번 승급으로 약간 변동이 있을 것 같다고. 내년 여름엔 로열발레단 동료들과 함께 한국을 찾아 갈라 공연을 열 계획이다. 아시아 발레리노 ‘최초’의 역사를 쓰고 있는 그에게 롤 모델이 있을까. 한참 골똘히 생각한 전준혁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롤 모델 같은 건 원래부터 없었고 누구를 나와 비교한 적도 없어요. 나다운 무용수, 나다운 예술가로 거듭나는 길만 있을 뿐입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