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친숙한 햄릿 공주님의 막장 복수극…국립극단 ‘햄릿’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이런 가부장적인 대사가 많다. 1601년에 발표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왕자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인 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숙부를 복수한다는 막장 치정극. 이야기를 주도하는 주인공도 남자고, 여자 등장인물들은 여리고 소극적인 성질을 지닌다.

국립극단의 <햄릿>은 이런 원작 속 설정을 과감하게 뒤집었다. 왕위 계승 서열 1위 햄릿 왕자를 햄릿 공주로 각색한 것. 주변 인물들의 성별도 뒤바꿨다. 햄릿의 애인 오필리어도 남자 미술가로 설정했다. 원작에 담겨있던 여성에 구시대적인 편견이 담긴 대사와 표현도 과감히 삭제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젠더 이슈를 이야기할 것 같지만 이 공연은 예상을 비껴간다. 뒤바뀐 성별이 '여성'을 이야기하는 소재보다는 <햄릿>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장치로 쓰인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원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살짝 비튼 <햄릿>이다.

배경은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뭉뚱그렸다. 인물 간의 관계나 통치 구조는 봉건 제도의 모습이지만 라디오 방송, 의상과 말투에서는 익숙한 현대 사회가 느껴진다. 배경이 되는 국가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생존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위태로운 국제 정세가 연상되는 설정이다. 선왕은 정복과 무력 외교로 살아남았지만 국민은 오랜 전쟁에 지쳐버렸다.

주변 인물 묘사에도 변주를 줬다. 총리 폴로니어스의 두 아들 레어티즈와 오필리어가 원작과 달리 예술가로 설정됐다. 끝없는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세상과 동떨어진 인물들이다. 원작에서 충신으로 묘사되는 폴로니어스도 한층 복합적인 인물로 그렸다. 죽음을 맞으며 "더러운 왕가놈들"이라고 외치며 무조건적인 충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욕망과 광기에 찌든 권력을 다그친다.
어딘가 친숙한 햄릿 공주님의 막장 복수극…국립극단 ‘햄릿’
새로운 결말이 관객을 의도적으로 더욱 헷갈리게 한다. 혼란한 정세를 틈타 적국의 포틴브라스 왕자가 햄릿의 나라를 지배하게 된 것. 선왕이 포틴브라스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는 내용이다. 클로디어스가 선왕을 살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더욱 크게 열어 막장 복수극의 비극과 혼돈을 더하는 영리한 설정이다.

원작과 또 다른 점은 언어. 화려한 비유가 굽이굽이 이어지는 셰익스피어 특유의 대사와 대조되는 직설적이고 단호한 대사가 두드러진다. 인물들의 각자의 생각과 판단을 꼼꼼하게 설명한다. 인물 간의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그려지고 비판이 날카로워지는 효과가 있다.

배경, 인물, 언어를 현대 사회에 더 맞닿도록 각색해 동시대성을 강화한 작품이다. 현대 관객도 공감할 수 있는 설정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관객에게 던진다.
어딘가 친숙한 햄릿 공주님의 막장 복수극…국립극단 ‘햄릿’
신랄하고 직설적인 분위기와 대조되는 아름다운 미장센이 인상적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조형이 아니라 물과 빛의 흐름을 활용한 연출이 돋보인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지하 감옥처럼 음침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는 녹색과 빨간색 조명이 비친 뿌연 안개가 인물들의 피와 영혼처럼 보인다. 마치 허공에 강이 흘러내리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 비극과 대비돼 더 기괴하면서 아름답다.

섬세하고 진득한 원작을 뒤틀어 직설적이고 굵직한 이야기를 하는 국립극단의 <햄릿>. 셰익스피어 희곡의 문학적인 매력은 덜하지만 대신 동시대성과 비판의식이 두드러진다. 물과 조명이 어우러져 펼쳐지는 무대가 매혹적이다. 공연은 7월 29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구교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