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산업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경쟁이 냉전 이후 30년 만에 다시 달아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인공지능(AI) 열풍과 이상기후가 이어지며 전력 수요가 급증하자 미국은 원전 지원 법률을 제정하고 차세대 원전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러시아는 국제사회 제재에도 해외 원전 사업에 잇따라 뛰어들어 외화벌이뿐만 아니라 글로벌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삼고 있다.

○美 원전 생태계 복원 안간힘

글로벌 원전 생태계 장악한 러시아…추격 나선 美
미 상원 환경·공공사업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위원장 성명을 통해 “초당적으로 추진된 미국 원자력발전법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원전 인허가를 촉진하는 이 법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지지로 지난 2월 하원을 통과하고 지난달 상원에서 가결됐다.

극한 대립 중인 미국 여야가 힘을 합친 것은 무너진 원전 생태계를 재건하는 게 급선무라는 판단 때문이다. AI 열풍과 전기자동차 확산 등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풍력과 태양광만으로는 탄소 배출 없는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제니퍼 그랜홈 에너지부 장관은 5월 조지아주 웨인즈버러에 신규 건설된 보글 원전 4호기를 방문해 “미국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려면 원전 설비 용량을 최소한 세 배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1996년 이후 자국에 건설한 원자로가 단 3기에 그치며 산업 기반이 약해졌다. 최근 준공한 보글 원자로 2기는 30년 만에 원전을 짓느라 추정 예산의 두 배인 350억달러가 들었다.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는 2017년 파산 신청을 하고 캐나다 사모펀드 브룩필드에 인수됐다.

미국 업계는 소형모듈원전(SMR) 등 차세대 소형 원자로 개발에도 나섰지만 이마저 원자력규제위원회 인허가에 발목이 잡혔다. 스타트업 등이 80여 종의 기술을 시험 중이지만 승인된 기술은 뉴스케일사 한 곳뿐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투자한 원자력발전사 테라파워는 와이오밍주 케머러에 SMR 발전소 부지 공사를 시작했으나 아직 원자로 인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번에 통과된 원자력발전법은 이런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해 차세대 원전 개발에 물꼬를 틔울 것으로 기대된다.

○신흥국 시장 휩쓰는 러시아 원전

러시아는 인도에 원전을 신규 건설하기로 하는 등 신흥국 시장 지배력을 높이고 있다. 이날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직후 국영 원자력 기업 로사톰은 “러시아가 인도에 6개의 고·저출력 원자력발전소를 새로 짓는 공동 프로젝트를 논의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는 2000년대 초반 인도에 진출해 로사톰 자회사가 타밀나두주 쿠단쿨람 지역에 경수로 2기를 지었고, 3·4호 원자로를 건설 중이다.

러시아는 전력 부족으로 정전·제한 송전 사태를 겪는 베트남에도 손을 내밀었다. 지난달 푸틴 대통령의 국빈 방문 수행단으로 베트남을 찾은 알렉세이 리카체프 로사톰 최고경영자(CEO)는 “(팜민찐) 베트남 총리에게 대형과 중·소형 원전은 물론 육상·해상 SMR 등을 베트남 측에 제안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집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러시아는 원자력발전소 건설, 연료 공급, 해체 또는 폐기물 관리 관련 국가 간 계약의 약 절반을 차지했다. 미국 싱크탱크 서드웨이의 조시 프리드 청정에너지 국장은 CNN 방송에서 “엄청난 경쟁 속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해외에서 모든 종류의 원자로 수출에 앞서 있고 미국은 따라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원전의 확산은 정치·군사적 협력 관계와 연결돼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우라늄 등 원전 연료를 러시아에 의존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국의소리(VOA)는 러시아가 방글라데시에 원전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인도양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모스크바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현일/김리안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