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자화상, 한국 최초 여성화가의 초상에 담긴 근대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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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은규의 길 위의 미술관 - 나혜석 편
① 정동예배당과 경성일보
① 정동예배당과 경성일보
이 그림을 본 적 있으세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라고 불리는 나혜석(1896-1948)의 자화상입니다.
파리 여행 중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사실적이었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평면적 붓질로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어두운 배경 속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우울하게 앉아 있습니다. 202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처음 열린 한국 근대미술 전시회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에 출품된 작품으로,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나혜석의 막내아들 김건의 유족이 수원시립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차남 김진 전 서울대 교수의 아들 스탠 김은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미술을 전공하고 미술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보며 ‘자랑스럽고 슬프다’고 말했답니다. 나혜석의 인생 역정을 보며 가지게 되는 소회가 그 소감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나혜석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이는 근대 초기 페미니스트로, 또 다른 누군가는 부도덕한 신여성으로 인식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측면들은 나혜석을 구성하는 면면들일 수도 있으나 몇 개의 단어만으로 한 인간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나혜석은 근대기 경성을 무대로 활동한 화가이자 작가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수원, 예산 등 곳곳에 남겨진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 공간의 역사와 거기에 얽힌 인물의 기억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공간의 자취와 그곳에 담긴 서사를 찾다 보면, 한 예술가가 근대 미술사의 초입에서 삶을 어떻게 마주했는지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이해해 볼 수 있겠지요.
이제 여정을 떠나볼까요? 우리 여정의 첫 번째 장소는 정동예배당입니다. 1988년 가수 이문세는 '광화문 연가'에서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라고 노래하며 사람들을 추억에 젖게 했지요. 이 노랫말 속의 교회당이 바로 현재의 정동제일교회이고, 나혜석이 살던 경성 시절의 정동예배당입니다. 정동은 19세기 후반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나 영사관이 밀집해 있던 곳이에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Mary Scranton, 1832-1909)가 세운 이화학당, 역시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배재학당도 이곳에 있었을 정도로, 당시 정동은 외국의 신문물이 유입되는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도 미국, 영국 대사관이 정동 지역에 있고 구 러시아 공사관 유적이 남아 있어 정동의 역사적 비중을 짐작하게 하지요.
1885년에 조선에 입국한 아펜젤러는 기독교 선교와 교육 사업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 주 무대가 정동이었습니다. 1887년 정동 37번지 일대에 배재학당을 세우고, 근처의 한옥을 개조한 ‘벧엘예배당’에서 예배를 봅니다. 이게 바로 국내 최초의 감리교 교회 정동예배당이지요. 교회 건물은 1897년에 완공되어 현재까지 한 세기 넘게 제자리를 지키며 지나간 세월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 교회 건축 양식을 따라 지은 단순하고 소박한 분위기의 예배당은 현재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나혜석은 바로 이 교회에서 변호사 김우영과 1920년 4월 10일에 결혼했습니다. 나혜석은 자유연애 사상이 풍미하던 일본 여자미술학교 유학 시절 게이오대에 다니던 문학청년 최승구(1892-1917)와 사랑에 빠졌었지요. 그런데 그가 25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하면서 크게 상심하고 다시는 연애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대요. 그러다가 둘째 오빠 나경석의 친구 김우영의 4년여에 걸친 구애를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두 사람의 빛바랜 결혼식 사진은 20세기 초임에도 현대의 결혼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을 보여줍니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신랑과 흰 한복에 면사포를 쓰고 부케를 든 신부 나혜석, 그리고 화동으로 보이는 아이들과 신랑 신부 들러리가 양쪽으로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러한 서양식 결혼 예식은 기독교의 전파와 때를 같이 하면서 주로 신여성 및 신가정이 출현한 도시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1920~30년대에는 신식 결혼이 주류가 될 정도로 유행했다고 해요.
처음 예배당 결혼에서 출발한 신식 결혼은 192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공간이 확장됩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신문사 강당, 공연장이었던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YMCA 강당 등 공공장소 등이 결혼식장으로 활용된 겁니다. 1940년대에는 낙원동 문명예식부 같은 전문 결혼식장들이 경성에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전통 생활 양식이 지배적이던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서구 문화가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결혼 풍속은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전통을 밀어냈습니다.
예배당에서 신식 결혼을 하는 신랑 신부 뒷배경으로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이 보입니다. 이 오르간은 1918년에 한국 최초로 설치되었는데, 6·25 전쟁 때 교회 건물이 반파되면서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1920년 사진이니 당시 이 오르간은 설치된 지 얼마 안 된 신문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겁니다. 더구나 한복 차림의 하객 대부분에게 서구식 교회 건물에서 이루어진 신식 결혼은 신기한 구경거리였겠지요.
나혜석의 결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있지요. 그녀가 김우영에게 내세웠던 세 가지 결혼 조건이 인구에 회자되곤 하는데요.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갓치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거슬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나혜석,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
근대 문화가 수용되던 중이기는 하나 축첩제, 여성의 사회 활동 제약, 봉건적 가족제도 등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구조가 완강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혼 조건을 내세울 수 있는 근원에는 활발하고 할 말은 하고야 마는 나혜석의 당찬 성정과 함께 그녀가 받아들인 근대적 사상이 있습니다. 나혜석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어쨌든 김우영은 이러한 결혼 조건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신혼여행으로 나혜석의 연인이었던 최승구의 묘를 찾았고 비석까지 세워 주었답니다.
나혜석은 결혼 후 경성부 숭이동(현 종로구 명륜동 2가)에 신접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나는 결코 가사를 범연히 하고 그림을 그려온 일은 없었습니다. 내 몸에 비단옷을 입어본 일이 없었고, 1분이라도 놀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라고 하며 예술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사실 그녀는 부지런한 화가였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바로 화필을 들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예술을 위해 청춘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은 것입니다.
그 결과 결혼 이듬해인 1921년 3월 18일과 19일에 걸쳐 매일신보, 경성일보 후원으로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생애 첫 유화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김관호가 도쿄미술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평양에서 첫 서양화 개인전을 연 적이 있으나, 경성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서양화 전시회인 데다 일본 유학을 마친 여성 화가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전시회가 열린 경성일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1906년 9월 1일부터 1945년 12월 11일까지 발행된 신문입니다. 총독부는 경성일보(일본어), 매일신보(국한문), The Seoul Press(영어) 세 신문을 기관지로 운영하며,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대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간지가 발행되기까지 독점적 지위를 누렸지요. 초창기 사옥은 대화정(현 중구 필동)에 있다가 1914년 구 대한제국 경위원 터(현 서울시청)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사옥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 자리는 경성부청의 부지로 선정되고, 경성일보는 1924년에 인근(현 한국언론재단)에 사옥을 신축하였습니다. 나혜석의 전시회는 1921년에 열렸으니 현 서울시청 위치에 사옥이 있던 시기입니다.
전시회가 열린 내청각은 경성일보의 강당이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 등의 공모전이 시작되었으나 전시 공간은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소규모 단체전이나 개인전은 주로 신문사 강당이 활용되었습니다. 경성의 중심지에 있던 경성일보에서는 나혜석 개인전 외에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개인전, 단체전 등이 많이 열렸습니다. 1926년에 광화문통에 사옥(현 일민미술관)을 새로 지은 동아일보사 강당에서는 이종우 개인전, 동미회전, 임용련 백남순 부부전, 구본웅 개인전, 이인성 개인전 등이 열렸습니다.
1930년대가 되면 전시 공간이 늘어나면서 미술 전시의 층위도 다양해집니다.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신백화점 등에 화랑이 생기고, 미술품을 전시 판매함으로써 백화점이 근대적 문화 향유 공간의 역할을 하지요. 또한 카페와 같은 소규모 전시 공간도 생깁니다. 카페 플라타느, 낙랑 파라, 본아미 등이 그러합니다. 예술가들의 교류 장소이기도 했던 이곳에서는 주로 소규모 동인전, 목판화전, 소품전 등이 열렸습니다.
나혜석의 전시회에는 풍경화를 중심으로 약 70점이 전시되었습니다. 학생 단체, 사회 각계 인사,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등의 관람객이 많았다고 합니다. 1921년 3월 21일자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첫날 입장자가 1천여 명이고 다음 날까지 5~6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 정도로 성황이었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3월 23일자 ‘미술전람회 감상 소감’에서는 직업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등장이 사회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증좌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전시 작품 중 20여 점이 팔렸으며 <신춘>이라는 작품은 350원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경성의 잘 지은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정도였다 하니 작품 가치를 추정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그림이 전시되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니 아쉬운 일입니다.
근대기에 시작된 작품의 공개 진열은 문인 묵객들 사이에서 예술이 향유되던 전통적 감상 방식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에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미술의 저변 확대로 이어집니다. 나혜석의 전시회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근대화된 문화 경험을 수용하는 관람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전시회를 마치고 나혜석은 4월에 장녀 김나열을 출산합니다. 이어서 9월에는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외교관으로 만주 안둥현(현 단동) 부영사로 부임하면서 바로 그곳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유복한 상류 계층으로 살면서 전문 화가로 화려하게 등단하던 그 청춘 시절이 그녀 인생의 화양연화였음을, 그리고 이어 질곡의 시간이 다가오게 될 것임을 그때의 나혜석은 짐작이나 했을까요?
“장차 올 청춘이었던들/ 아꼈을는지 모르나/ 이미 간 청춘을/ 아끼지 않나니/ 청춘은 들떴었고/ 얕았었고/ 짧았던 것이오” (나혜석, 아껴 무엇 하리 청춘을, 『삼천리』, 1935)
최은규 칼럼니스트
▶▶▶[한이수의 길 위의 미술관 (박수근 편) 보기]
나혜석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이는 근대 초기 페미니스트로, 또 다른 누군가는 부도덕한 신여성으로 인식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측면들은 나혜석을 구성하는 면면들일 수도 있으나 몇 개의 단어만으로 한 인간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나혜석은 근대기 경성을 무대로 활동한 화가이자 작가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수원, 예산 등 곳곳에 남겨진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 공간의 역사와 거기에 얽힌 인물의 기억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공간의 자취와 그곳에 담긴 서사를 찾다 보면, 한 예술가가 근대 미술사의 초입에서 삶을 어떻게 마주했는지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이해해 볼 수 있겠지요.
이제 여정을 떠나볼까요? 우리 여정의 첫 번째 장소는 정동예배당입니다. 1988년 가수 이문세는 '광화문 연가'에서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라고 노래하며 사람들을 추억에 젖게 했지요. 이 노랫말 속의 교회당이 바로 현재의 정동제일교회이고, 나혜석이 살던 경성 시절의 정동예배당입니다. 정동은 19세기 후반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나 영사관이 밀집해 있던 곳이에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Mary Scranton, 1832-1909)가 세운 이화학당, 역시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배재학당도 이곳에 있었을 정도로, 당시 정동은 외국의 신문물이 유입되는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도 미국, 영국 대사관이 정동 지역에 있고 구 러시아 공사관 유적이 남아 있어 정동의 역사적 비중을 짐작하게 하지요.
1885년에 조선에 입국한 아펜젤러는 기독교 선교와 교육 사업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 주 무대가 정동이었습니다. 1887년 정동 37번지 일대에 배재학당을 세우고, 근처의 한옥을 개조한 ‘벧엘예배당’에서 예배를 봅니다. 이게 바로 국내 최초의 감리교 교회 정동예배당이지요. 교회 건물은 1897년에 완공되어 현재까지 한 세기 넘게 제자리를 지키며 지나간 세월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 교회 건축 양식을 따라 지은 단순하고 소박한 분위기의 예배당은 현재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나혜석은 바로 이 교회에서 변호사 김우영과 1920년 4월 10일에 결혼했습니다. 나혜석은 자유연애 사상이 풍미하던 일본 여자미술학교 유학 시절 게이오대에 다니던 문학청년 최승구(1892-1917)와 사랑에 빠졌었지요. 그런데 그가 25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하면서 크게 상심하고 다시는 연애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대요. 그러다가 둘째 오빠 나경석의 친구 김우영의 4년여에 걸친 구애를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두 사람의 빛바랜 결혼식 사진은 20세기 초임에도 현대의 결혼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을 보여줍니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신랑과 흰 한복에 면사포를 쓰고 부케를 든 신부 나혜석, 그리고 화동으로 보이는 아이들과 신랑 신부 들러리가 양쪽으로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러한 서양식 결혼 예식은 기독교의 전파와 때를 같이 하면서 주로 신여성 및 신가정이 출현한 도시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1920~30년대에는 신식 결혼이 주류가 될 정도로 유행했다고 해요.
처음 예배당 결혼에서 출발한 신식 결혼은 192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공간이 확장됩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신문사 강당, 공연장이었던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YMCA 강당 등 공공장소 등이 결혼식장으로 활용된 겁니다. 1940년대에는 낙원동 문명예식부 같은 전문 결혼식장들이 경성에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전통 생활 양식이 지배적이던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서구 문화가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결혼 풍속은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전통을 밀어냈습니다.
예배당에서 신식 결혼을 하는 신랑 신부 뒷배경으로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이 보입니다. 이 오르간은 1918년에 한국 최초로 설치되었는데, 6·25 전쟁 때 교회 건물이 반파되면서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1920년 사진이니 당시 이 오르간은 설치된 지 얼마 안 된 신문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겁니다. 더구나 한복 차림의 하객 대부분에게 서구식 교회 건물에서 이루어진 신식 결혼은 신기한 구경거리였겠지요.
나혜석의 결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있지요. 그녀가 김우영에게 내세웠던 세 가지 결혼 조건이 인구에 회자되곤 하는데요.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갓치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거슬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나혜석,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
근대 문화가 수용되던 중이기는 하나 축첩제, 여성의 사회 활동 제약, 봉건적 가족제도 등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구조가 완강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혼 조건을 내세울 수 있는 근원에는 활발하고 할 말은 하고야 마는 나혜석의 당찬 성정과 함께 그녀가 받아들인 근대적 사상이 있습니다. 나혜석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어쨌든 김우영은 이러한 결혼 조건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신혼여행으로 나혜석의 연인이었던 최승구의 묘를 찾았고 비석까지 세워 주었답니다.
나혜석은 결혼 후 경성부 숭이동(현 종로구 명륜동 2가)에 신접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나는 결코 가사를 범연히 하고 그림을 그려온 일은 없었습니다. 내 몸에 비단옷을 입어본 일이 없었고, 1분이라도 놀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라고 하며 예술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사실 그녀는 부지런한 화가였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바로 화필을 들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예술을 위해 청춘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은 것입니다.
그 결과 결혼 이듬해인 1921년 3월 18일과 19일에 걸쳐 매일신보, 경성일보 후원으로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생애 첫 유화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김관호가 도쿄미술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평양에서 첫 서양화 개인전을 연 적이 있으나, 경성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서양화 전시회인 데다 일본 유학을 마친 여성 화가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전시회가 열린 경성일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1906년 9월 1일부터 1945년 12월 11일까지 발행된 신문입니다. 총독부는 경성일보(일본어), 매일신보(국한문), The Seoul Press(영어) 세 신문을 기관지로 운영하며,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대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간지가 발행되기까지 독점적 지위를 누렸지요. 초창기 사옥은 대화정(현 중구 필동)에 있다가 1914년 구 대한제국 경위원 터(현 서울시청)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사옥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 자리는 경성부청의 부지로 선정되고, 경성일보는 1924년에 인근(현 한국언론재단)에 사옥을 신축하였습니다. 나혜석의 전시회는 1921년에 열렸으니 현 서울시청 위치에 사옥이 있던 시기입니다.
전시회가 열린 내청각은 경성일보의 강당이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 등의 공모전이 시작되었으나 전시 공간은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소규모 단체전이나 개인전은 주로 신문사 강당이 활용되었습니다. 경성의 중심지에 있던 경성일보에서는 나혜석 개인전 외에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개인전, 단체전 등이 많이 열렸습니다. 1926년에 광화문통에 사옥(현 일민미술관)을 새로 지은 동아일보사 강당에서는 이종우 개인전, 동미회전, 임용련 백남순 부부전, 구본웅 개인전, 이인성 개인전 등이 열렸습니다.
1930년대가 되면 전시 공간이 늘어나면서 미술 전시의 층위도 다양해집니다.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신백화점 등에 화랑이 생기고, 미술품을 전시 판매함으로써 백화점이 근대적 문화 향유 공간의 역할을 하지요. 또한 카페와 같은 소규모 전시 공간도 생깁니다. 카페 플라타느, 낙랑 파라, 본아미 등이 그러합니다. 예술가들의 교류 장소이기도 했던 이곳에서는 주로 소규모 동인전, 목판화전, 소품전 등이 열렸습니다.
나혜석의 전시회에는 풍경화를 중심으로 약 70점이 전시되었습니다. 학생 단체, 사회 각계 인사,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등의 관람객이 많았다고 합니다. 1921년 3월 21일자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첫날 입장자가 1천여 명이고 다음 날까지 5~6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 정도로 성황이었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3월 23일자 ‘미술전람회 감상 소감’에서는 직업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등장이 사회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증좌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전시 작품 중 20여 점이 팔렸으며 <신춘>이라는 작품은 350원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경성의 잘 지은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정도였다 하니 작품 가치를 추정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그림이 전시되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니 아쉬운 일입니다.
근대기에 시작된 작품의 공개 진열은 문인 묵객들 사이에서 예술이 향유되던 전통적 감상 방식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에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미술의 저변 확대로 이어집니다. 나혜석의 전시회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근대화된 문화 경험을 수용하는 관람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전시회를 마치고 나혜석은 4월에 장녀 김나열을 출산합니다. 이어서 9월에는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외교관으로 만주 안둥현(현 단동) 부영사로 부임하면서 바로 그곳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유복한 상류 계층으로 살면서 전문 화가로 화려하게 등단하던 그 청춘 시절이 그녀 인생의 화양연화였음을, 그리고 이어 질곡의 시간이 다가오게 될 것임을 그때의 나혜석은 짐작이나 했을까요?
“장차 올 청춘이었던들/ 아꼈을는지 모르나/ 이미 간 청춘을/ 아끼지 않나니/ 청춘은 들떴었고/ 얕았었고/ 짧았던 것이오” (나혜석, 아껴 무엇 하리 청춘을, 『삼천리』, 1935)
최은규 칼럼니스트
▶▶▶[한이수의 길 위의 미술관 (박수근 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