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 선구자' 뒤에 숨은 욕망…당신이 몰랐던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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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앤디 워홀, 벨벳 분노와 아름다움
60년대 실험적 흑백 필름
먹고 잠자는 단순한 움직임
1초에 16프레임 끊기듯 촬영
관찰자 시선에 집중하게 해
남성의 신체 토르소 연작
폴라로이드 1664장 달해
여성으로 표현 '드래그' 초상
육체의 미적 탐구 드러내
앤디 워홀, 벨벳 분노와 아름다움
60년대 실험적 흑백 필름
먹고 잠자는 단순한 움직임
1초에 16프레임 끊기듯 촬영
관찰자 시선에 집중하게 해
남성의 신체 토르소 연작
폴라로이드 1664장 달해
여성으로 표현 '드래그' 초상
육체의 미적 탐구 드러내
팝 아트의 선구자, 대중적 상품인 캠벨 수프 캔을 그리고 브릴로 비누 상자를 예술작품으로 재현한 작가,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해 마릴린 먼로 등 스타를 그린 스타, 자신의 작업실 ‘팩토리’에서 조수들과 함께 작품을 대량 생산해 미술에서 원작자의 의미를 재해석한 인물,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뜨렸으나 그 누구보다도 상업적이었던 현대미술가. 아마도 그는 이 같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는 20세기 가장 유명한 현대미술가 중 한 명일 것이다.
워홀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현대미술가는 아닐 것이다. 그는 전통적 작가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개인적으로도 예술과 유명세, 돈과 관련한 그의 행보와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워홀로 대표되는 팝 아트는 현대미술이 지나치게 상업화하는 데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동시대 미술 제도가 마치 미술 시장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듯한 요즘 상황에 무력감을 느끼던 중 독일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서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다. 왜, 지금, 이곳에서 워홀의 전시가 열려야 하는가. 궁금증을 품고 전시를 보러 갔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전시 제목 ‘앤디 워홀. 벨벳 분노와 아름다움(Andy Warhol. Velvet Rage and Beauty)’이 눈에 들어온다. 이성애·남성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자가 느끼는 분노를 다룬 앨런 다운스의 소설 <더 벨벳 레이지(The Velvet Rage)>에서 가져온 제목이란 소개를 읽으며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단순히 팝 아트의 아이콘을 보이는 전시가 아니라 또 다른 워홀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예측할 수 있어서다. 벨벳이란 단어는 그가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연상케 했다. 마치 바나나 껍질을 벗기듯 앤디 워홀을 한 꺼풀 벗겨내는 전시가 될 수 있을까.
전시는 워홀이 광고나 책의 삽화를 그리며 상업미술가로 이름을 날리던 1950년대부터 1987년 58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기 전까지 총망라한다. 그를 유명하게 한 실크스크린 작품은 물론 드로잉, 폴라로이드 사진, 필름 등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300여 점이 걸렸다.
입구에서 마주하는 작품은 그의 흑백 필름이다. 실험적인 영화제작자로서 활동한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보여준다. 1960년대 제작된 워홀의 흑백 필름은 키스하거나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모습 등 단순한 움직임을 1초에 16개 프레임이 영사되게 한다. 대상의 느리고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라 관찰하는 그의 시선에 집중하게 된다. 워홀의 시선에 보다 더 많은 초점을 둬야 한다는 걸 선언하는 셈이다. 수많은 드로잉 작품은 기계적인 실크스크린 작업과 달리 미술가로서 그의 손길과 자취를 보여준다. 그리는 대상에 대한 워홀의 탐닉과 솔직한 욕망이 드러난다.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지속된 탐구는 1970년대 제작된 ‘토르소(Torso)’ 연작에서 두드러지는데, 남성의 신체를 그려낸 실크스크린과 폴라로이드 사진 등은 그의 성적 정체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을 대담하게 밝힌다. 특히 토르소 연작으로 촬영된 폴라로이드 사진은 1664장에 이른다고 하니 아름다움을 포착하고자 하는 집념을 엿볼 수 있다.
1980년대 스스로를 다른 성으로 표현한 워홀의 드래그 초상 사진과 장 미셸 바스키아와 협업한 작품 등도 포함됐다. 이 시기의 작품은 반복, 그리고 부분과 전체의 변주를 통해 이상에 접근하려는 그의 작업 스타일이 완숙되어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바스키아의 손, 팔, 가슴, 다리 등 신체 부분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다비드상처럼 바스키아를 이면화로 그려낸 대형 실크스크린 작품은 사적 아름다움의 축제를 펼치는 듯했다.
전시는 연대기적으로 진열된 듯하나 실은 그렇지 않은 점이 가장 인상적이다. 미스 반데어로에가 건축한 미니멀리즘으로 가득한 미술관 전시홀에 겹겹이 세워진 가벽은 시간 순서에 따른 관람을 강제하지 않는다. 각 섹션에 입구를 여러 개 배치해 다양한 동선으로 관람할 수 있다. 팝 아트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워홀이 실제로는 여러 겹의 내면이 있는 예술가임을 전시 구조적으로, 시각적으로 상징한 셈이다.
‘앤디 워홀’ 베를린 전시는 동시대 미술에서 전시 기획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한다. 클라우스 비젠바흐 신국립미술관장과 리사 보티 큐레이터가 공동 기획한 이 전시는 누구나 알고 있다고 여기는 뻔한 예술가조차 어떻게 조명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어쩌면 다양한 성적 감수성을 보다 열린 태도로 수용하는 베를린이기에 가능한 전시기도 하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 워홀. 그의 이면들이 과거 성소수자가 차별받던 시대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다름을 배척하고 낙인찍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베를린=변현주 큐레이터
워홀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현대미술가는 아닐 것이다. 그는 전통적 작가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개인적으로도 예술과 유명세, 돈과 관련한 그의 행보와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워홀로 대표되는 팝 아트는 현대미술이 지나치게 상업화하는 데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동시대 미술 제도가 마치 미술 시장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듯한 요즘 상황에 무력감을 느끼던 중 독일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서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다. 왜, 지금, 이곳에서 워홀의 전시가 열려야 하는가. 궁금증을 품고 전시를 보러 갔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전시 제목 ‘앤디 워홀. 벨벳 분노와 아름다움(Andy Warhol. Velvet Rage and Beauty)’이 눈에 들어온다. 이성애·남성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자가 느끼는 분노를 다룬 앨런 다운스의 소설 <더 벨벳 레이지(The Velvet Rage)>에서 가져온 제목이란 소개를 읽으며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단순히 팝 아트의 아이콘을 보이는 전시가 아니라 또 다른 워홀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예측할 수 있어서다. 벨벳이란 단어는 그가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연상케 했다. 마치 바나나 껍질을 벗기듯 앤디 워홀을 한 꺼풀 벗겨내는 전시가 될 수 있을까.
전시는 워홀이 광고나 책의 삽화를 그리며 상업미술가로 이름을 날리던 1950년대부터 1987년 58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기 전까지 총망라한다. 그를 유명하게 한 실크스크린 작품은 물론 드로잉, 폴라로이드 사진, 필름 등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300여 점이 걸렸다.
입구에서 마주하는 작품은 그의 흑백 필름이다. 실험적인 영화제작자로서 활동한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보여준다. 1960년대 제작된 워홀의 흑백 필름은 키스하거나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모습 등 단순한 움직임을 1초에 16개 프레임이 영사되게 한다. 대상의 느리고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라 관찰하는 그의 시선에 집중하게 된다. 워홀의 시선에 보다 더 많은 초점을 둬야 한다는 걸 선언하는 셈이다. 수많은 드로잉 작품은 기계적인 실크스크린 작업과 달리 미술가로서 그의 손길과 자취를 보여준다. 그리는 대상에 대한 워홀의 탐닉과 솔직한 욕망이 드러난다.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지속된 탐구는 1970년대 제작된 ‘토르소(Torso)’ 연작에서 두드러지는데, 남성의 신체를 그려낸 실크스크린과 폴라로이드 사진 등은 그의 성적 정체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을 대담하게 밝힌다. 특히 토르소 연작으로 촬영된 폴라로이드 사진은 1664장에 이른다고 하니 아름다움을 포착하고자 하는 집념을 엿볼 수 있다.
1980년대 스스로를 다른 성으로 표현한 워홀의 드래그 초상 사진과 장 미셸 바스키아와 협업한 작품 등도 포함됐다. 이 시기의 작품은 반복, 그리고 부분과 전체의 변주를 통해 이상에 접근하려는 그의 작업 스타일이 완숙되어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바스키아의 손, 팔, 가슴, 다리 등 신체 부분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다비드상처럼 바스키아를 이면화로 그려낸 대형 실크스크린 작품은 사적 아름다움의 축제를 펼치는 듯했다.
전시는 연대기적으로 진열된 듯하나 실은 그렇지 않은 점이 가장 인상적이다. 미스 반데어로에가 건축한 미니멀리즘으로 가득한 미술관 전시홀에 겹겹이 세워진 가벽은 시간 순서에 따른 관람을 강제하지 않는다. 각 섹션에 입구를 여러 개 배치해 다양한 동선으로 관람할 수 있다. 팝 아트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워홀이 실제로는 여러 겹의 내면이 있는 예술가임을 전시 구조적으로, 시각적으로 상징한 셈이다.
‘앤디 워홀’ 베를린 전시는 동시대 미술에서 전시 기획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한다. 클라우스 비젠바흐 신국립미술관장과 리사 보티 큐레이터가 공동 기획한 이 전시는 누구나 알고 있다고 여기는 뻔한 예술가조차 어떻게 조명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어쩌면 다양한 성적 감수성을 보다 열린 태도로 수용하는 베를린이기에 가능한 전시기도 하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 워홀. 그의 이면들이 과거 성소수자가 차별받던 시대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다름을 배척하고 낙인찍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베를린=변현주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