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 티켓파워에 굿즈 구매력까지…K스포츠 '여풍당당'
올 하반기 첫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지난 9일 서울 올림픽로 잠실야구장. 1회초 기아타이거즈 김도영 선수가 안타를 치자 여성 팬들의 함성에 경기장이 들썩였다. 이날 관중석의 절반 이상은 각 구단이 출시한 캐릭터 머리띠를 쓰거나 응원 손팻말을 든 여성 팬이 차지했다. 최연희 씨(22)는 “친구 따라 경기를 보러 왔다가 투수 한 명을 좋아하게 돼 계속해서 직관하고 있다”며 “유니폼과 머리띠를 모으기 위해 광주, 부산 등으로 ‘원정’을 가기도 한다”고 했다.

국내 프로 스포츠 시장에서 2030 여성이 ‘큰손’으로 떠올랐다. 한때는 ‘남자들의 취미’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야구장뿐 아니라 축구장, 농구장 등에서도 여성 관중이 절반을 훌쩍 넘는다. 구단과 기업들의 스포츠 마케팅에선 ‘여심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게 성공 방정식으로 굳어졌다. 유통·패션 기업들도 풋살·러닝 등 여성을 겨냥한 행사와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야구 찐팬’ 5명 중 3명은 여성

12일 한국프로스포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프로야구 고관여팬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63%였다. 고관여팬이란 자신이 관심 있는 리그의 지난 시즌 우승팀과 응원 구단의 선수를 모두 알고 있고 유니폼까지 보유한 사람이다. 연령대별로는 20대(37.7%)와 30대(22.9%)가 60%를 넘었다. 야구에 진심인 팬 중에서 젊은 여성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한국 프로 스포츠계에 불어닥친 ‘여풍’은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세계 주요 스포츠 시장인 미국, 유럽 등에선 여성 팬 비중이 꾸준히 줄고 있어서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4월 “한국 야구장에선 여성 팬들 함성이 더 크게 들리는 등 여성 관람객이 남성보다 많다”며 “미국에선 여성이 절반에 못 미치고, 영국과 호주에선 4분의 1 이하로 떨어진 것과 대조적”이라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트렌드가 한국의 경기장과 주변 환경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여성들이 저녁 늦게 경기가 끝난 뒤에도 대중교통으로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고, 어린이 놀이방(서울 고척스카이돔), 즉석 바비큐존(인천 SSG랜더스필드) 등 가족 친화적 시설을 갖춘 경기장도 많다. 김종호 롯데자이언츠 경영부문장은 “프로야구 경기 관람 티켓이 1만원대라 한 사람당 10만원이 훌쩍 넘는 뮤지컬, 콘서트 등에 비해 가성비 측면에서 매력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아이돌 가수 팬덤을 닮은 스포츠 팬 문화도 한몫한다. NYT는 “한국 여성 스포츠 팬들은 좋아하는 선수를 따라 전국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러 다닌다”며 “K팝 아이돌을 숭배하는 팬덤 문화가 스포츠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프로 스포츠 구단들도 팬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경기 전후 선수들이 훈련하거나 서로 대화하는 장면 등을 숏폼으로 제작해 SNS에 올린다.

◆스포츠 마케팅 필승 공식 ‘여심 저격’

예능, 영화, 웹툰 등 각종 콘텐츠로 스포츠를 접한 뒤 야구뿐 아니라 농구, 축구, 배구에 빠진 여성 팬도 늘어났다.

농구 웹툰 ‘가비지타임’과 영화 ‘슬램덩크’를 통해 농구에 입문했다는 김지혜 씨(24)는 “웹툰에서 보던 경기 규칙들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프로스포츠협회가 올해 프로축구, 야구, 배구, 농구 등 4개 종목의 팬 성별 비중을 조사한 결과 57.1%가 여성이었다. 2016년(38.5%)과 비교해 18.6%포인트 늘었다.

구단들도 스포츠 마케팅에서 ‘여심 저격’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최근 에버랜드와 손잡고 ‘레시앤프렌즈’라는 브랜드로 봉제인형, 인형키링, 메탈배지 등을 제작한 게 대표적이다. 인형은 3만2000원, 키링은 1만6000원인데도 출시하자마자 ‘완판’됐다. K리그도 2030 여성에게 인기 높은 캐릭터 산리오코리아와 협업해 굿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보는 스포츠’에서 ‘하는 스포츠’로 옮겨가는 여성이 많아져 스포츠 판도 커지고 있다. 최근엔 여성 풋살 인기의 영향으로 지방자치단체, 대학, 기업들이 잇달아 여성 풋살 대회를 열고 있다.

올해 4월 기준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동호인 축구 여성 선수는 3855명으로 2019년 말 3190명에 비해 20% 늘었다.

라현진/이선아 기자/사진=임형택 기자 raral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