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스토렌트의 첫 AI 반도체 '그레이스컬' / 사진=텐스토렌트
텐스토렌트의 첫 AI 반도체 '그레이스컬' / 사진=텐스토렌트
저전력·저비용으로 맞춤 설계를 지원하는 ‘RISC-V’ 아키텍처가 인공지능(AI) 반도체 패권을 가를 새로운 무기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앞다퉈 이 분야 선두로 꼽히는 캐나다의 텐스토렌트와 협력을 강화하며 우군 확보에 나섰다.

RISC-V가 뭐길래

1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스마트폰, PC, 모빌리티, 데이터센터 등 모든 산업에서 AI를 원활하게 구동해줄 AI 반도체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이를 설계하는데 최적화된 RISC-V 사용이 높아지고 있다. RISC-V는 반도체 설계 시 활용되는 개방형 아키텍처로, 미국 UC버클리대 연구진이 2010년부터 개발해 2014년 공개했다.

반도체 아키텍처에서 가장 유명한 인텔 x86은 성능 최적화에, ARM은 저전력·고효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x86은 PC에, ARM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반도체 설계에 주로 활용된다. 특히 ARM 아키텍처는 로열티를 받고 삼성전자, 애플, 퀄컴 등 세계 1000여 반도체 기업에 제공하고 있다. 전력 사용이 많은 x86에 비해 작고 효율적인 프로세서를 만들 수 있어서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바꼈다. AI 반도체에 성능 최적화와 저전력·고효율의 두 장점이 동시에 필요해지면서 이를 모두 갖춘 RISC-V 설계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명령을 인식하고 수행하는 ‘명령어 세트’(ISA) 수에서도 x86은 1500개, ARM은 200개인 반면 RISC-V는 47개로 단순화했다. ISA 개수가 줄어들면서 발열 문제를 해결했다.
짐 켈러 텐스토렌트 CEO / 사진=텐스토렌트
짐 켈러 텐스토렌트 CEO / 사진=텐스토렌트
RISC-V는 개발 권리가 개방돼 있어 누구나 칩을 사용할 수 있는 아키텍처다. 자유로운 설계 변경과 응용도 가능해 복잡한 라이선스 과정도 거치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90% 이상, 태블릿PC의 85% 이상에 활용돼 독과점 우려가 높은 ARM이 로열티 가격을 올리면 설계자 입장에선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지만 RISC-V는 이같은 문제에서 자유롭다. 칩 제작에 투입되는 비용 중 설계 IP 비용은 약 15%다. 기업 입장에서 AI 반도체 단가가 올라가는 만큼 RISC-V 사용시 설계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반도체의 전설’ 짐 켈러

RISC-V 선도 기업은 2016년 설립된 캐나타의 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텐스토렌트다. ‘반도체의 전설’로 불리는 짐 켈러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이 회사는 IP 라이센싱과 고객 맞춤형 칩렛(하나의 칩에 여러 개의 칩을 집적하는 기술) 설계를 주요 사업 모델로 삼아 기업 가치 10억 달러(1조3000억 원)에 이르는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켈러 CEO가 2020년 텐스토렌트에 최고기술책임자(CTO)로 합류했을 당시 직원은 60명에 불과했지만 이젠 300여 명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다.

켈러 CEO는 반도체 설계에서 전설적인 엔지니어로 꼽힌다. 그는 애플 아이폰에 쓰이는 ‘A칩’, AMD의 PC용 중앙연산장치(CPU) ‘라이젠’ 등 고성능 반도체 설계를 주도했다. 테슬라에선 자율 주행 차량을 위한 첫 AI 칩인 ‘오토파일럿 하드웨어 2.0’의 설계 리더로 활약했다.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전 세계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업계에 영향을 끼칠 정도다. 그런 그가 RISC-V를 전면에 내세우자 수많은 설계 엔지니어들이 RISC-V 연구와 활용에 힘을 쏟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게 업계 관계자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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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대기업들은 RISC-V를 팹리스의 미래로 점찍은 켈러 CEO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8월 삼성카탈리스트펀드(SCF)를 통해 텐스토렌트에 1억달러(약 1380억원) 투자를 주도했다.

LG전자는 텐스토렌트와 협력해 TV와 기타 제품용 반도체를 개발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지난달 북미 출장 중 켈러 CEO를 만났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텐스토렌트에 5000만달러(약 690억원)를 투자했다. 현대모비스는 올초 주총에서 텐스토렌트의 키스 위텍 최고전략책임자(COO)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텐스토렌트는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차세대 AI 반도체 ‘퀘이사’를 양산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로 삼성전자의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을 선택했다. 일본 도요타, 닛산 등 글로벌 완성차업체의 대규모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RISC-V 도입 기업들

켈러 CEO가 RISC-V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AI 시대의 기술 혁명에 ‘오픈소스’가 중요하다고 봐서다. 켈러 CEO는 지난해 11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 AI 포럼 2023’ 기조연설에서 “지난 40년간 기술 영역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발전이 개방적으로 이뤄져 왔다는 점”이라며 “오픈소스는 제품의 다양성 확보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RISC-V 생태계에 많은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며 RISC-V 생태계를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RISC-V 지원을 위한 SW 개발도 생겨나는 추세다. RISE(RISC-V Software Ecosystem)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RISE는 RISC-V 기반 SW를 공동 개발하기 위해 출범했다. 삼성전자, 구글, 인텔, 퀄컴 등 글로벌 IT·반도체 업체 13개 회사가 이사회 멤버로 참여했다.
지난달 17일(현지시간)부터 나흘간 북미를 방문 중인 구광모 LG 대표(왼쪽)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AI 반도체 설계 업체 텐스토렌트의 짐 켈러 CEO와 기념 촬영하고 있다. / 사진=LG 제공
지난달 17일(현지시간)부터 나흘간 북미를 방문 중인 구광모 LG 대표(왼쪽)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AI 반도체 설계 업체 텐스토렌트의 짐 켈러 CEO와 기념 촬영하고 있다. / 사진=LG 제공
구글은 TPU(텐서프로세서유닛)를, 미 항공우주국(NASA)는 차세대 고성능 우주선 CPU 설계에 RISC-V 코어를 도입했다. 일본 반도체 업체 르네사스도 RISC-V 기반으로 설계된 MCU(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 제품을 출시했다. 인텔 역시 RISC-V 프로세서 개발에 4억 유로(5900억원)를 투자했고 중국은 RISC-V 관련 프로젝트 ‘장샨’(Xianshan)을 위한 연구소를 구축했다.

시장조사업체 BCC리서치는 지난해 4억4500만달러(약 6150억원) 규모였던 RISC-V 시장이 연평균 33.1% 성장해 2027년에는 27억달러(3조73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시장 규모 자체가 크진 않지만 이를 바탕으로 생산되는 칩의 개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파급력은 더욱 가팔라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RISC-V를 기반으로 생산된 반도체가 올해부터 매년 50% 가량 증가해 2030년에는 170억개의 프로세서가 출하될 것으로 예상했다.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약 4분의 1이 RISC-V 기반의 반도체가 될 것이며, 자동차 분야의 RISC-V 반도체 생산량은 연평 66%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담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개방형인 RISC-V의 사용자 접근성이 뛰어나지만 ARM이 구축한 익숙함도 무시할 수 없어 당분간 두 아키텍처가 공존할 것”이라며 “국내 현장과 학계에서도 이미 RISC-V를 많이 들여다보고 있는 만큼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면 한국이 선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사진=지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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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