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형 피아니즘의 정수 보여준 '육각형 예술가' 스티븐 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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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면에 재능을 보이는 이들을 '육각형 인재'라고 한다. 현존하는 예술가 중 이런 인물을 꼽자면 단연 영국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 경일 것이다. 1961년생인 그는 연주, 작곡, 음반에서 놀라울 만큼 출중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개인전을 여는 화가이자, 여러 권의 저서를 쓴 작가다. 거의 '사기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재능은 예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충만한 인문학적 지식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각종 진리를 탐구하는 이 시대의 공식 지성인이기도 하다. 올리버 색스, 재레드 다이아몬드 등과 함께 ‘살아있는 박식가들’로 꼽힌다.
다방면에서 출중한 업적 남겨
허프 경의 내한 리사이틀이 지난 13일 16년 만에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열렸다. 그가 오랜만에 선보인 피아노 독주는 "왜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무대였다. 한 분야만 아주 깊게 파서 극한의 경지에 오른 연주자를 볼 때 청중들은 이들의 광기와 신비로움에 매료된다. '르네상스형 예술가' 허프의 연주는 그 매력이 사뭇 달랐다. 그의 연주에서는 무궁무진한 세계관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창의성과 실험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1,2부에 모두 프랑스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1857∼1944)가 포함돼 신선함을 더했다. 샤미나드는 국내에서는 생소한 작곡가지만 유럽에서는 유명한 여성 작곡가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그의 피아노 작품을 즐겨들었다고.
1부는 샤미나드의 콘서트 에튀드 ‘가을’과 '이전에’로 시작됐다. 두 작품 모두 내밀하고 정교한 음악 어법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어릴 때부터 샤미나드의 음악을 마음에 담았다는 허프는 샤미나드의 음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건반 위에 펼쳐냈다. 첫 곡 '가을'에서는 내성과 외성의 밸런스를 극대화하며 목가적인 느낌을 살렸고, '이전에'는 스카를라티가 연상되는 반복적인 꾸밈음 음형을 통해 별처럼 반짝이는 소리를 구현했다. 이어 연주한 리스트 소나타 b 단조는 꽤 실험적이었다. 워낙 장대한 서사와 화려한 테크닉으로 점철된 작품인 만큼 그보다 기능적으로 뛰어나게 연주하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다만, 그의 연주는 관성적으로 치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다양한 영감을 고집스럽게 실물의 소리로 하나하나 구현해 나가는 근성에서 그만의 창의성이 느껴졌다. 또, 그는 건반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듯했다. 선이 굵은 저음 부분에서 연주할 때는 각지고 힘찬 타건으로 연주했고, 고음 부분에서는 유연한 타건으로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유려하게 이어갔다. 종종 폭포처럼 쏟아지는 옥타브 음형에서는 타건의 정확성이 흐려질 때가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3곡의 앙코르로 청중들에게 화답
2부 프로그램은 샤미나드의 '변주곡 A장조', ‘숲의 요정’과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샤미나드의 두 곡은 특히 쇼팽의 서정적이고 내밀한 음악과 어울렸는데, 아르페지오 음향을 특징으로 하는 A장조 변주곡은 홀 전체를 청량함과 경쾌함으로 가득 채웠다. 숲의 요정
에서는 보석처럼 투명한 음향으로 화려한 반음계 파트를 선보이며 소리를 관중들을 매료했다.
허프는 곧바로 쇼팽 소나타 3번을 연주했다. 다소 투박한 도입이었고, 전반적으로 통상적인 루바토(템포를 어느 정도 수준 내에서 유연하게 조절) 스타일과 조금씩 달라서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허프는 앞서 에세이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에서 리스트 b 단조 소나타와 쇼팽 b 단조 소나타(소나타 제3번) 중 라이브 연주를 하기에는 쇼팽이 훨씬 까다롭다고 말한 바 있다. 쇼팽 특유의 극도로 미묘하고 민감한 뉘앙스를 콘서트장에서 구현하는 것은 실패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그래서 리스트에 비해 쇼팽 소나타에서는 허프의 강점과 약점이 좀 더 구분됐다. 이를테면 손가락이 빠르고 오밀조밀 돌아가야 하는 2악장보다는 풍성한 화성과 여러 성부가 조화를 이루며 진행되는 3악장에서 허프의 매력은 더욱 배가 됐다. 마찬가지로 4악장에서는 다소 템포가 급해지면서 종종 양손의 밸런스가 아쉬울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단지 연주를 끝마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 한 음까지 꿋꿋이 본인의 음악을 고수하며 완주해냈다.
허프의 창의성과,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근성에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고, 이에 그는 무려 3곡의 앙코르로 화답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
허프 경의 내한 리사이틀이 지난 13일 16년 만에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열렸다. 그가 오랜만에 선보인 피아노 독주는 "왜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무대였다. 한 분야만 아주 깊게 파서 극한의 경지에 오른 연주자를 볼 때 청중들은 이들의 광기와 신비로움에 매료된다. '르네상스형 예술가' 허프의 연주는 그 매력이 사뭇 달랐다. 그의 연주에서는 무궁무진한 세계관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창의성과 실험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1,2부에 모두 프랑스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1857∼1944)가 포함돼 신선함을 더했다. 샤미나드는 국내에서는 생소한 작곡가지만 유럽에서는 유명한 여성 작곡가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그의 피아노 작품을 즐겨들었다고.
1부는 샤미나드의 콘서트 에튀드 ‘가을’과 '이전에’로 시작됐다. 두 작품 모두 내밀하고 정교한 음악 어법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어릴 때부터 샤미나드의 음악을 마음에 담았다는 허프는 샤미나드의 음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건반 위에 펼쳐냈다. 첫 곡 '가을'에서는 내성과 외성의 밸런스를 극대화하며 목가적인 느낌을 살렸고, '이전에'는 스카를라티가 연상되는 반복적인 꾸밈음 음형을 통해 별처럼 반짝이는 소리를 구현했다. 이어 연주한 리스트 소나타 b 단조는 꽤 실험적이었다. 워낙 장대한 서사와 화려한 테크닉으로 점철된 작품인 만큼 그보다 기능적으로 뛰어나게 연주하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다만, 그의 연주는 관성적으로 치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다양한 영감을 고집스럽게 실물의 소리로 하나하나 구현해 나가는 근성에서 그만의 창의성이 느껴졌다. 또, 그는 건반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듯했다. 선이 굵은 저음 부분에서 연주할 때는 각지고 힘찬 타건으로 연주했고, 고음 부분에서는 유연한 타건으로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유려하게 이어갔다. 종종 폭포처럼 쏟아지는 옥타브 음형에서는 타건의 정확성이 흐려질 때가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3곡의 앙코르로 청중들에게 화답
2부 프로그램은 샤미나드의 '변주곡 A장조', ‘숲의 요정’과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샤미나드의 두 곡은 특히 쇼팽의 서정적이고 내밀한 음악과 어울렸는데, 아르페지오 음향을 특징으로 하는 A장조 변주곡은 홀 전체를 청량함과 경쾌함으로 가득 채웠다. 숲의 요정
에서는 보석처럼 투명한 음향으로 화려한 반음계 파트를 선보이며 소리를 관중들을 매료했다.
허프는 곧바로 쇼팽 소나타 3번을 연주했다. 다소 투박한 도입이었고, 전반적으로 통상적인 루바토(템포를 어느 정도 수준 내에서 유연하게 조절) 스타일과 조금씩 달라서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허프는 앞서 에세이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에서 리스트 b 단조 소나타와 쇼팽 b 단조 소나타(소나타 제3번) 중 라이브 연주를 하기에는 쇼팽이 훨씬 까다롭다고 말한 바 있다. 쇼팽 특유의 극도로 미묘하고 민감한 뉘앙스를 콘서트장에서 구현하는 것은 실패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그래서 리스트에 비해 쇼팽 소나타에서는 허프의 강점과 약점이 좀 더 구분됐다. 이를테면 손가락이 빠르고 오밀조밀 돌아가야 하는 2악장보다는 풍성한 화성과 여러 성부가 조화를 이루며 진행되는 3악장에서 허프의 매력은 더욱 배가 됐다. 마찬가지로 4악장에서는 다소 템포가 급해지면서 종종 양손의 밸런스가 아쉬울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단지 연주를 끝마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 한 음까지 꿋꿋이 본인의 음악을 고수하며 완주해냈다.
허프의 창의성과,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근성에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고, 이에 그는 무려 3곡의 앙코르로 화답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