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촌… 세종대왕도 이중섭도 이완용도 살았던 곳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한이수의 서촌기행
통의동 백송 터(1)
통의동 백송 터(1)
서울 서촌을 들락거린 지 벌써 10년은 된 것 같다. 신문사 근무 시절, 주요 광고주들과 서촌 초입의 한정식집에서 식사하고 남아있는 직원들과 찾아간 곳이 수성동 계곡 근처였다. 차를 타고 가면서 서울의 여타 지역과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사실 이 주변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단골집이라는 제법 유명한 삼계탕집이 경복궁 근처에 있어서 직원들과 몇 번 왔던 곳이다.
그러나 낮에 길게 줄 서서 밥만 먹고 부랴부랴 돌아설 때와는 전혀 달랐다. 밤이 어느 정도 무르익을 때 청신한 인왕산 바람을 맞으며 둘러보았던 서촌의 밤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주말에 아내와 서울에 좀 색다른 곳이 있다고 하며 다시 찾았다. 통인시장을 들러 위쪽 동네까지 가보았다. 잘 정돈된 계곡이 별천지처럼 나타났다. 당시에는 이곳을 알리는 아무런 푯말이 없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수성동계곡'이었다. 만 마리의 말이 달릴 때 나는 소리처럼 시원한 물줄기가 암반 사이를 공명하며 흐르는 곳.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이때부터 나의 서촌 사랑은 시작되었다. 무언가 다른 서울,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달라 보였다. 지역의 특성은 분명 사람들의 표정까지 바꾸는 묘한 매력이 있나 보다. 수성동의 계곡물과 그 주변의 풍광, 이런 것들이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수성동' 그림을 보고 똑같이 만들었다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정보를 찾아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촌에 데리고 간 것 같다. 생각하니 좀 지나친 감이 있다. 내가 무슨 서촌 홍보대사도 아닌데…. 책을 찾아 읽고 논문을 찾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늦은 나이에 시작한 대학원 공부에서 교수님은 자세히도 이곳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서촌을 사랑하니 서촌이 나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촌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 미술과 문학, 역사적 층위가 너무도 다채롭게 쌓여 있는 서촌 이야기. 이제는 한 번 정리하면서 풀어가려고 한다. 이 글은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조금 지나 오른쪽으로 골목으로 들어서면 나타나는 '통의동 백송 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경복궁 좌측부터 사직터널 우측까지이다. 옛 지도를 보면 인왕산 아랫동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첫 장면의 골목길 모습도 체부동이다. 조선시대의 골목이 아직도 그대로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체부동, 필운동, 통의동, 효자동, 통인동, 궁정동, 옥인동, 누하동, 누상동, 사직동, 창성동, 청운동 등이다.
그런데 사실 서촌을 예전에는 '우대', '웃대', 한문으로는 '上村'이라고 불렀다. 한양의 중심을 흐르는 청계천은 서울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북촌, 남촌도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과 남의 마을로 나누듯이. 청계천 상류 지역을 웃대라 불렀다. 그러면 아랫대는 어디인가? 동대문 아래 왕십리 근처를 아랫대, 하촌이라 했다.
이곳에 누가 살았을까? 조선시대에는 태종 이방원, 세종대왕, 겸재 정선을 비롯한 무수한 시인 묵객들, 근대의 화가와 문인들이 이곳과 연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문인으로는 이광수, 서정주, 노천명, 윤동주, 이상 등등 화가는 이중섭, 나혜석, 이상범, 천경자, 이쾌대, 김용준, 이승만, 정현웅, 구본웅 등등 헤아릴 수 없다. 이들을 다 훑고 나가기에도 벅차다. 그럼 좋은 사람만 살았을까?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윤덕영까지…. 예술적 서정이 충만해 풍광 아름다운 이곳을 찾은 사람부터 풍광 아름다운 곳을 혼자 누리기 위해 넓은 지역을 차지한 사람들까지 두루두루 이곳의 땅을 밟았다. 이곳에서 태어난 예술 작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탄생했다. 근대로 넘어와서 이중섭은 수성동계곡에서 새벽마다 일어나 멱을 감고 미도파화랑의 개인전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의 소 그림 중 가장 안정적이라고 평가 받는 <흰 소>도, 노천명이 말년에 쓴 <이름 없는 여인 되어>도 'made in 서촌'이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하숙하며 쓴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별'도 다름이 아닌 '서촌의 별'이라면 이 지역의 정체성을 한 번 따져 볼 만하다. 지금 서울의 면적은 어림잡아 1800만평인데 사대문 안을 한양이라 부르던 조선시대에는 500만평 정도였다. 그러나 5대 궁궐과 종묘를 빼고, 산악지대를 빼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청계천 이북 지역인 북촌에서는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고, 청계천 남쪽 지역인 남촌에는 벼슬과는 무관한 남인계열 양반들이 주로 살았다.
서울의 동쪽 성균관 근처를 '반촌'이라 했는데 유생들을 돕기 위한 사람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다루는 '반인'들이 주로 살았다. 이곳 한양의 서쪽 지역, 인왕산 아래에 가장 많이 살았던 사람들은 중인들이다. 경복궁 근처라 궁궐 출입이 잦은 전문직 중인들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풍광들을 노래했다. 서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촌지역.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려고 한다. 처음 이야기는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인근에 있는 '통의동 백송 터'이다. 하얀 소나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소나무를 좋아했다. 아이를 낳으면 탯줄에 소나무를 꺾어 달았다. 솔방울과 소나무를 꺾어 불을 지펴 방안 구들장을 데웠다. 소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시집을 보내고 추석에는 솔잎을 따서 송편 아래에 깔아 향기를 즐겼다. 죽어서도 소나무 관에 들어가는 우리나라 사람들. 그런데 흰 소나무라니. 백송의 원산지는 중국 베이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기 힘들다. 그런데 소나무를 너무도 좋아하다 보니 신기한 흰 소나무를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왔다.
백의민족이 흰 소나무를 탐내는 것은 무죄인가? 그런데 키우기가 너무 어려웠다. 원산지인 중국과 우리나라의 생태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살아남은 백송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천연기념물 1호에서 10호 중 백송은 6개나 된다. 현재 4개는 죽고 2개만 남았다. 이곳의 소나무는 추사 김정희가 가지고 왔다고도 하는데 김정희 백송은 예산의 추사 고택에 있고 이곳의 나무는 누가 가지고 왔는지 모른다. 이곳에 있던 천연기념물 4호로 지정된 큰 백송, 높이는 16미터, 둘레 5미터, 600살로 추정된 나무였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300년으로 밝혀짐). 그런데 1990년 태풍을 맞아서 쓰러졌다. 청와대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백송을 살리기 위한 '백송회생추진위원회'까지 만들었다. 24시간 나무 철통 경계, 다각도의 회생 수술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1993년, 2년 10개월의 노력 끝에도 끝내 살리지 못했다. 세간에는 귀한 백송을 관으로 쓰면 최고로 상품 가치가 있다고 해서 죽이려고 제초제를 뿌렸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살리려고 하고 한쪽에서는 고사시키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나무를 살리려고 한 할머니가 동네 백송지킴이 홍 할머니였다. 그분은 누군가가 뿌린 제초제를 손으로 걷어내다가 화상까지 입었다는데…. 지금 이곳에 있는 후계목은 백송을 아끼는 누군가가 솔방울을 채취해 후손을 남겨둔 덕분이다. 그 나무들도 쓰러진 백송 사이에 세 그루나 있다. 문화재청, 서울시, 종로구청에서 심은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 있던 천연기념물 4호로 지정된 백송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막연하게나마 알고 싶으면 조계사 경내의 백송 (천연기념물 9호)이나 헌법재판소의 백송 (천연기념물 8호)을 보면 된다.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이 가져와 심었다는 백송이면 분명히 이 자리는 중요한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와 관계가 있을까?
한이수 칼럼니스트
그러나 낮에 길게 줄 서서 밥만 먹고 부랴부랴 돌아설 때와는 전혀 달랐다. 밤이 어느 정도 무르익을 때 청신한 인왕산 바람을 맞으며 둘러보았던 서촌의 밤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주말에 아내와 서울에 좀 색다른 곳이 있다고 하며 다시 찾았다. 통인시장을 들러 위쪽 동네까지 가보았다. 잘 정돈된 계곡이 별천지처럼 나타났다. 당시에는 이곳을 알리는 아무런 푯말이 없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수성동계곡'이었다. 만 마리의 말이 달릴 때 나는 소리처럼 시원한 물줄기가 암반 사이를 공명하며 흐르는 곳.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이때부터 나의 서촌 사랑은 시작되었다. 무언가 다른 서울,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달라 보였다. 지역의 특성은 분명 사람들의 표정까지 바꾸는 묘한 매력이 있나 보다. 수성동의 계곡물과 그 주변의 풍광, 이런 것들이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수성동' 그림을 보고 똑같이 만들었다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정보를 찾아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촌에 데리고 간 것 같다. 생각하니 좀 지나친 감이 있다. 내가 무슨 서촌 홍보대사도 아닌데…. 책을 찾아 읽고 논문을 찾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늦은 나이에 시작한 대학원 공부에서 교수님은 자세히도 이곳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서촌을 사랑하니 서촌이 나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서촌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 미술과 문학, 역사적 층위가 너무도 다채롭게 쌓여 있는 서촌 이야기. 이제는 한 번 정리하면서 풀어가려고 한다. 이 글은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조금 지나 오른쪽으로 골목으로 들어서면 나타나는 '통의동 백송 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경복궁 좌측부터 사직터널 우측까지이다. 옛 지도를 보면 인왕산 아랫동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첫 장면의 골목길 모습도 체부동이다. 조선시대의 골목이 아직도 그대로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체부동, 필운동, 통의동, 효자동, 통인동, 궁정동, 옥인동, 누하동, 누상동, 사직동, 창성동, 청운동 등이다.
그런데 사실 서촌을 예전에는 '우대', '웃대', 한문으로는 '上村'이라고 불렀다. 한양의 중심을 흐르는 청계천은 서울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북촌, 남촌도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과 남의 마을로 나누듯이. 청계천 상류 지역을 웃대라 불렀다. 그러면 아랫대는 어디인가? 동대문 아래 왕십리 근처를 아랫대, 하촌이라 했다.
이곳에 누가 살았을까? 조선시대에는 태종 이방원, 세종대왕, 겸재 정선을 비롯한 무수한 시인 묵객들, 근대의 화가와 문인들이 이곳과 연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문인으로는 이광수, 서정주, 노천명, 윤동주, 이상 등등 화가는 이중섭, 나혜석, 이상범, 천경자, 이쾌대, 김용준, 이승만, 정현웅, 구본웅 등등 헤아릴 수 없다. 이들을 다 훑고 나가기에도 벅차다. 그럼 좋은 사람만 살았을까?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윤덕영까지…. 예술적 서정이 충만해 풍광 아름다운 이곳을 찾은 사람부터 풍광 아름다운 곳을 혼자 누리기 위해 넓은 지역을 차지한 사람들까지 두루두루 이곳의 땅을 밟았다. 이곳에서 태어난 예술 작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탄생했다. 근대로 넘어와서 이중섭은 수성동계곡에서 새벽마다 일어나 멱을 감고 미도파화랑의 개인전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의 소 그림 중 가장 안정적이라고 평가 받는 <흰 소>도, 노천명이 말년에 쓴 <이름 없는 여인 되어>도 'made in 서촌'이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하숙하며 쓴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별'도 다름이 아닌 '서촌의 별'이라면 이 지역의 정체성을 한 번 따져 볼 만하다. 지금 서울의 면적은 어림잡아 1800만평인데 사대문 안을 한양이라 부르던 조선시대에는 500만평 정도였다. 그러나 5대 궁궐과 종묘를 빼고, 산악지대를 빼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청계천 이북 지역인 북촌에서는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고, 청계천 남쪽 지역인 남촌에는 벼슬과는 무관한 남인계열 양반들이 주로 살았다.
서울의 동쪽 성균관 근처를 '반촌'이라 했는데 유생들을 돕기 위한 사람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다루는 '반인'들이 주로 살았다. 이곳 한양의 서쪽 지역, 인왕산 아래에 가장 많이 살았던 사람들은 중인들이다. 경복궁 근처라 궁궐 출입이 잦은 전문직 중인들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풍광들을 노래했다. 서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촌지역.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려고 한다. 처음 이야기는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인근에 있는 '통의동 백송 터'이다. 하얀 소나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소나무를 좋아했다. 아이를 낳으면 탯줄에 소나무를 꺾어 달았다. 솔방울과 소나무를 꺾어 불을 지펴 방안 구들장을 데웠다. 소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시집을 보내고 추석에는 솔잎을 따서 송편 아래에 깔아 향기를 즐겼다. 죽어서도 소나무 관에 들어가는 우리나라 사람들. 그런데 흰 소나무라니. 백송의 원산지는 중국 베이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기 힘들다. 그런데 소나무를 너무도 좋아하다 보니 신기한 흰 소나무를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왔다.
백의민족이 흰 소나무를 탐내는 것은 무죄인가? 그런데 키우기가 너무 어려웠다. 원산지인 중국과 우리나라의 생태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살아남은 백송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천연기념물 1호에서 10호 중 백송은 6개나 된다. 현재 4개는 죽고 2개만 남았다. 이곳의 소나무는 추사 김정희가 가지고 왔다고도 하는데 김정희 백송은 예산의 추사 고택에 있고 이곳의 나무는 누가 가지고 왔는지 모른다. 이곳에 있던 천연기념물 4호로 지정된 큰 백송, 높이는 16미터, 둘레 5미터, 600살로 추정된 나무였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300년으로 밝혀짐). 그런데 1990년 태풍을 맞아서 쓰러졌다. 청와대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백송을 살리기 위한 '백송회생추진위원회'까지 만들었다. 24시간 나무 철통 경계, 다각도의 회생 수술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1993년, 2년 10개월의 노력 끝에도 끝내 살리지 못했다. 세간에는 귀한 백송을 관으로 쓰면 최고로 상품 가치가 있다고 해서 죽이려고 제초제를 뿌렸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살리려고 하고 한쪽에서는 고사시키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나무를 살리려고 한 할머니가 동네 백송지킴이 홍 할머니였다. 그분은 누군가가 뿌린 제초제를 손으로 걷어내다가 화상까지 입었다는데…. 지금 이곳에 있는 후계목은 백송을 아끼는 누군가가 솔방울을 채취해 후손을 남겨둔 덕분이다. 그 나무들도 쓰러진 백송 사이에 세 그루나 있다. 문화재청, 서울시, 종로구청에서 심은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 있던 천연기념물 4호로 지정된 백송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막연하게나마 알고 싶으면 조계사 경내의 백송 (천연기념물 9호)이나 헌법재판소의 백송 (천연기념물 8호)을 보면 된다.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이 가져와 심었다는 백송이면 분명히 이 자리는 중요한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와 관계가 있을까?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