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시대의 렘브란트'…美 거장 빌 비올라 73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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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촬영 통한 슬로우모션으로 내면세계 탐구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종교적 전통서 영감
한국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의 조수로 인연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종교적 전통서 영감
한국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의 조수로 인연
“내 작품이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은 미술관도, 상영관도, 텔레비전도, 심지어 스크린도 아니다. 바로 그것을 보는 관객의 마음이다.”
'비디오아트의 렘브란트'로 불린 미국의 영상예술 거장 빌 비올라(1951~2024)가 12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73세. 작가의 배우자이자 오랜 동업자인 키라 페로프 등 유족은 "사인은 알츠하이머와 관련된 합병증"이라며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자택에서 평안히 별세했다"고 전했다.
비올라는 비디오 설치 작업과 전자음악 퍼포먼스를 오가며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탐구했다. 가장 물질적인 도구로, 인간의 정신 세계를 깊이 있게 다루며 40년 넘게 동시대 미디어 아트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의 제자로 비디오 아트를 순수예술의 반열에 올린 예술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비디오아트가 기술적 가능성에 머물렀던 1970년대부터 이미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영상 세계를 확장했다.
그는 동서양 미술뿐 아니라 불교 선종과 이슬람 수피교, 기독교의 신비주의 등 종교적 전통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고속촬영을 통한 슬로우 모션 기법으로 유명한데, 정지된 듯 느린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시각화한 그의 작품들은 관객이 내면 세계에 빠져들게끔 유도한다. 끊임 없이 쏟아지는 비, 타오르는 불과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작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숭고함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1951년 뉴욕 퀸스 출신인 그의 어릴 적 기억은 깊은 물 속에서 시작한다. 여섯살 때 사촌과 놀러 간 호수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삼촌의 손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무거운 돌처럼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던 그는 "다른 차원의 포털에 들어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거기서 본 것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푸른 세상, 작은 사물들의 움직임, 한 줄기 빛….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서 삼촌의 손길을 뿌리치기도 했죠." 비디오 기술이 발전하던 1970년대에 비올라는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시러큐스 대학에서 백남준, 피터 캠퍼스 등 미디어아트 선구자들의 조수로 일하며 매체의 무한한 표현 가능성에 눈을 떴다. 시각적 왜곡으로 가득 채운 영상이나 폐쇄회로(CC)TV 설치작업 등 실험적인 기교가 돋보이는 초기작업들을 선보였다.
작품에 철학적인 깊이가 더해진 건 평생의 동반자인 페로프를 만나고부터다. 1977년 예술감독으로 일하던 페로프의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하며 처음 만난 이들은 2년 뒤 뉴욕에서 결혼했다. 배우자와 함께 캐나다의 대평원과 튀니지의 사막, 히말라야의 티베트 사원, 일본의 불교 사찰 등을 취재하며 관찰한 이미지는 이후 작업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소재가 됐다. 역사적 거장들을 흠모했던 비올라는 과거의 표현양식과 현대 기술을 융합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미국 대표작가로서 전시한 'The Greeting'가 그중 하나다.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자코포 다 폰토르모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영상이다. 2010년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나란히 그의 'Emergence'가 설치되기도 했다.
대표작은 2000년 전후를 기점으로 쏟아져 나왔다. ‘놀라움의 5중주’(2000)는 남녀 5인의 표정과 몸짓 변화를 45초간 촬영해 15분으로 확장했다. 극도의 슬로 모션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실제 속도에선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인간의 순간적인 눈빛 변화와 몸짓, 빛의 변화와 공기의 흐름까지 잡아낸 걸작이다. ‘천년을 위한 다섯 천사들’(2001) 역시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상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물속에 뛰어들면서 시작한다. 무중력 상태와 같은 우주적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간의 형상을 연출했다. 다섯개의 비디오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각각의 영상이 회화 못지않은 서정적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비올라의 ‘느림의 미학’은 성스러운 종교화와 같은 감상도 전한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자신만의 고통이나 비극적 상황을 반추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아주 먼 여행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비디오아트는 오는 11월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 2020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이후 4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개인전이다. 국제갤러리는 "일평생 삶과 죽음, 그 여정에서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를 탐구해온 비디오아트 작품들을 다시 고찰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비디오아트의 렘브란트'로 불린 미국의 영상예술 거장 빌 비올라(1951~2024)가 12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73세. 작가의 배우자이자 오랜 동업자인 키라 페로프 등 유족은 "사인은 알츠하이머와 관련된 합병증"이라며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자택에서 평안히 별세했다"고 전했다.
비올라는 비디오 설치 작업과 전자음악 퍼포먼스를 오가며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탐구했다. 가장 물질적인 도구로, 인간의 정신 세계를 깊이 있게 다루며 40년 넘게 동시대 미디어 아트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의 제자로 비디오 아트를 순수예술의 반열에 올린 예술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비디오아트가 기술적 가능성에 머물렀던 1970년대부터 이미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영상 세계를 확장했다.
그는 동서양 미술뿐 아니라 불교 선종과 이슬람 수피교, 기독교의 신비주의 등 종교적 전통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고속촬영을 통한 슬로우 모션 기법으로 유명한데, 정지된 듯 느린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시각화한 그의 작품들은 관객이 내면 세계에 빠져들게끔 유도한다. 끊임 없이 쏟아지는 비, 타오르는 불과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작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숭고함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1951년 뉴욕 퀸스 출신인 그의 어릴 적 기억은 깊은 물 속에서 시작한다. 여섯살 때 사촌과 놀러 간 호수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삼촌의 손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무거운 돌처럼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던 그는 "다른 차원의 포털에 들어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거기서 본 것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푸른 세상, 작은 사물들의 움직임, 한 줄기 빛….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서 삼촌의 손길을 뿌리치기도 했죠." 비디오 기술이 발전하던 1970년대에 비올라는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시러큐스 대학에서 백남준, 피터 캠퍼스 등 미디어아트 선구자들의 조수로 일하며 매체의 무한한 표현 가능성에 눈을 떴다. 시각적 왜곡으로 가득 채운 영상이나 폐쇄회로(CC)TV 설치작업 등 실험적인 기교가 돋보이는 초기작업들을 선보였다.
작품에 철학적인 깊이가 더해진 건 평생의 동반자인 페로프를 만나고부터다. 1977년 예술감독으로 일하던 페로프의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하며 처음 만난 이들은 2년 뒤 뉴욕에서 결혼했다. 배우자와 함께 캐나다의 대평원과 튀니지의 사막, 히말라야의 티베트 사원, 일본의 불교 사찰 등을 취재하며 관찰한 이미지는 이후 작업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소재가 됐다. 역사적 거장들을 흠모했던 비올라는 과거의 표현양식과 현대 기술을 융합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미국 대표작가로서 전시한 'The Greeting'가 그중 하나다.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자코포 다 폰토르모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영상이다. 2010년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나란히 그의 'Emergence'가 설치되기도 했다.
대표작은 2000년 전후를 기점으로 쏟아져 나왔다. ‘놀라움의 5중주’(2000)는 남녀 5인의 표정과 몸짓 변화를 45초간 촬영해 15분으로 확장했다. 극도의 슬로 모션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실제 속도에선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인간의 순간적인 눈빛 변화와 몸짓, 빛의 변화와 공기의 흐름까지 잡아낸 걸작이다. ‘천년을 위한 다섯 천사들’(2001) 역시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상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물속에 뛰어들면서 시작한다. 무중력 상태와 같은 우주적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간의 형상을 연출했다. 다섯개의 비디오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각각의 영상이 회화 못지않은 서정적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비올라의 ‘느림의 미학’은 성스러운 종교화와 같은 감상도 전한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자신만의 고통이나 비극적 상황을 반추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아주 먼 여행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비디오아트는 오는 11월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 2020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이후 4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개인전이다. 국제갤러리는 "일평생 삶과 죽음, 그 여정에서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를 탐구해온 비디오아트 작품들을 다시 고찰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