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뷔네!

베를린 시내 어디에서도 탈 수 있는 S반(철도)을 타고 피헬스베르크(Pichelsberg)역에서 내려 십분 가량 걸으면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숲속을 거닐면 만나게 되는 거대한 원형 극장, 그곳은 바로 발트뷔네(숲의 극장)다.

테크노 음악 덕후에게 베억하인(Berghain, 입장 기준을 종잡을 수 없기로 유명한 클럽)이 있다면 클래식 음악 덕후에게는 발트뷔네가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1984년 이래 매해 시즌을 마무리하는 그곳, 야외 음악회의 전형이자 완성본인 곳, 이름만 들어도 설렜던 그곳, 영상물로만 접하던 그곳에 드디어 직접 다녀왔다.

피헬스베르크 역과 가까워질수록 S반에 사람들이 꽉 차기 시작했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베를린 필하모닉 발트뷔네 연주에 가는 클래식 음악 덕후들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들 목적지가 같았는지 인파에 몸을 실으니 자연스럽게 원형 극장에 도착했다. 숲속 무대라는 이름에 걸맞게도 그곳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울창한 숲속에 위치한 대규모 원형 극장이었다.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약 2만 2천석이 관객으로 가득찬 발트뷔네. 연주 시작 전 살짝 내리던 빗방울은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그쳤다. /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약 2만 2천석이 관객으로 가득찬 발트뷔네. 연주 시작 전 살짝 내리던 빗방울은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그쳤다. /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티켓과 소지품을 간단히 체크하고 받은 리플렛을 보니 그제야 발트뷔네에 온 것이 비로소 실감 나기 시작했다. 원형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연령대도 차림새도 다양했다. 데이트인 것이 분명한 듯 잘 차려입은 연인들부터 갓난아기를 포함한 3대가 같이 온 가족도 있었다.

공통점은 모두 약속한 듯이 질서 있고 조용하게 행동했다는 점이다. 맥주, 샴페인, 와인 등 주류를 파는 곳이 있었고 대부분이 손에 잔을 들고 있는 데다가 간단한 과일과 간식거리도 반입이 가능한 야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타인의 반경을 침범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이런 자연 속 이런 사람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이라니... 찾았다, 덕후의 천국! 그것은 바로 발트뷔네였다.

낯선 도시 베를린에 당도해 부랴부랴 숲까지 찾아와 2만명이 넘는 인파에 둘러싸인 채 그만 정신을 놓아버린 덕후의 모습과 기가 막히게 일치하는 곡, <민둥산의 하룻밤> (무소르그스키 곡)이 올해 발트뷔네의 첫 곡이었다. 관객들은 곡이 시작되자마자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집중해 심지어 음악 소리와 바람결에 나무들이 부딪히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작 전 살짝 내린 빗방울이 숲의 싱그러운 내음을 더해주었고 이따금씩 전해 오는 새 소리는 플룻 솔로와 절묘하게 섞여 반짝였다. 환상적인 순간이었다.

일렁이는 마음을 다잡을 틈도 잠시. 이윽고 숲의 무대는 슈퍼스타 피아니스트 유자 왕의 차지가 되었다. 그녀의 외모와 복장만큼이나 화려하고 강렬한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인 만큼 예습도 열심히 하고 갔는데 예습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하늘 아래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발트뷔네를 둘러싼 대자연은 모든 순간에 개입해 제3의 음악을 빚어내고 있었다.
석양으로 물든 숲속 무대 /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석양으로 물든 숲속 무대 /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음악과 시간이 하나 되어 흐르고 흰 텐트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천천히 퍼져가는 황금빛 석양은 나른하고 목가적인 <다프니스와 클로에> (라벨 곡)와 더없이 잘 어울렸고 덕후의 내적 흥은 한없이 고조되어 <볼레로> (라벨 곡)에 맞추어 환희의 춤을 추었다.

발트뷔네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 곡, <베를린의 공기> 아니던가. 숨죽여 음악을 듣던 2만 2천명의 관객이 일제히 박자에 맞춰 발랄하게 휘파람을 부는 장관이 펼쳐진다. 그 소리에 미약한 숨결이나마 보태 보고자 올해 내내 휘파람 연습을 열심히 했다. 키릴 페트렌코가 객석을 돌아보며 두 손을 크게 젓자 관객들은 무대와 가까운 안쪽 객석부터 바깥쪽 객석까지 차례로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켜고 일종의 파도타기를 만들었다. 스크린에는 함박웃음을 머금은 베를린 필 단원들이 비쳐졌고 숲속 무대 위에서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베를린 필은 베를리너들에게 진정으로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베를린 필의 모든 시즌은 발트뷔네에서 연주하는 <베를린의 공기> (파울 린케 곡)로 마무리한다. 이 곡의 후렴구 박자에 맞춰 관객은 휘파람을 분다. 사진 속 관객들의 팔(!)에서 흥겨움이 전해진다. /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베를린 필의 모든 시즌은 발트뷔네에서 연주하는 <베를린의 공기> (파울 린케 곡)로 마무리한다. 이 곡의 후렴구 박자에 맞춰 관객은 휘파람을 분다. 사진 속 관객들의 팔(!)에서 흥겨움이 전해진다. /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꿈결 같고 천국 같던 발트뷔네는 질서정연한 S반 탑승으로 거짓말같이 마무리됐다. 클래식 덕후라면 꼭 한번은 경험할 만하고, 머글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내한 연주회를 할 수 있지만, 원형 극장과 울창한 숲까지 같이 가져올 수는 없으니 발트뷔네를 더욱 찾아갈 만하다.

내년 발트뷔네를 찾을 분들을 위해 아래에 짤막한 팁을 남겨 둔다.

⦁ 티켓은 베를린 필하모닉 홈페이지에서 구매할 수 있다. 매년 대부분 매진이므로 가급적 빠른 구매를 추천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비롯한 독일 오케스트라 연주회는 현지에서 취소표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 티켓 구매 이후 입장 관련 유의사항이 빼곡하게 적힌 안내 이메일이 온다. 가방은 A4용지 크기를 넘으면 안 되고, 유리병과 캔은 반입이 안 되며, 종이 커트러리와 작은 플라스틱 물병, 투명한 비닐에 담긴 간식 반입은 가능하다. 장우산은 안되지만, 접이식 우산은 가져올 수 있다.
⦁ 유리병 반입이 안되어 술을 가지고 갈 수 없지만(..) 탄식하지 않아도 된다! 현장에서 각종 주류 및 음료를 파는 부스가 있다. 이 부스에서 음료를 사면 플라스틱 컵에 담아주는데, 퇴장할 때 컵을 반환하면 컵 1개당 2유로를 돌려준다.
⦁ 소시지, 감자튀김 등 간식을 파는 부스도 있다.
⦁ 대규모 극장이지만 단차가 잘 설계된 덕분에 시야는 쾌적한 편이다. 오페라글라스가 있다면 더 좋은 감상이 된다. 간이 방석과 우비를 챙겨 온 사람도 많았다.
⦁ 숲인 만큼 풀벌레, 모기 등이 있을 수 있으니 무섭다면 모기 퇴치제를 가져가면 좋다. 막상 경험한 벌레는 별로 없긴 했었다.
⦁ 굿즈를 파는 곳은 닫혀 있었다. 화장실은 입구에 있고 원형 극장 안에도 있다. 휴지, 비누 등이 구비되어 있었고 청결했다. 다만 워낙 인파가 많으니 화장실 입장 줄이 길 수 있다.
박수와 환호로 마무리하는 발트뷔네 /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박수와 환호로 마무리하는 발트뷔네 / 사진. ⓒ이은아 칼럼니스트
이은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