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석 칼럼] '등산의 목적'과 반일의 목적
일본 학자들은 한국을 ‘일본 역사의 방파제’라고 부른다. 중국과 만주의 팽창 압력에 한국의 정치적 세력이 강력히 저항한 덕에 일본 열도가 외세의 침략에 덜 시달렸다는 얘기다. 한반도가 외침을 받은 횟수는 대략 1000번. 반면 일본은 놀랍게도 딱 두 번에 불과하다. 한 번은 13세기 북규슈에 침입한 몽골군이고, 또 한 번은 태평양전쟁 때의 미국이다. 그나마 몽골군은 태풍으로 금세 물러났고, 미국은 일본 스스로 자초한 외침이다. 실질적으로 주변 세력에 시달린 경험은 전무한 셈이다.

반면 거대한 자연재해는 주로 일본을 집어삼킨다. 태풍과 지진 등은 일본 열도가 막아준 덕에 한국이 피해를 덜 입는다. 한국을 ‘지질학적으론 천국, 지정학적으론 지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일본은 정확히 그 반대다. 문화적으로도 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 옛날 화려했던 중화 문명은 늘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됐다. 이런 밀접함은 간혹 독이 된다. 가깝기에 상처도 크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피해를 본 여러 나라 가운데 유독 한국인의 반일 감정이 거센 이유로 “장기간에 걸쳐 역사를 공유해온, 같은 문화권의 이웃 나라에 식민지화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서 <위험한 일본책>에서)

눈치 빠른 정치인들이 이런 속성을 놓칠 리 없다. 두서가 없어도 맥락이 없어도, 심지어 국익에 해가 되더라도 일단 반일 깃발을 들면 정치적으로 이득이다. 이달 초 국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국민의힘이 논평을 통해 ‘한·미·일 동맹’이라는 표현을 쓰자 야당 의원들의 득달같은 공세가 이어졌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이참에 독도를 일본에 넘겨주자는 거냐”고 포문을 열자, 같은 당 민병덕 의원은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정한론을 버리지 않았다”고 지원사격을 했으며, 이성윤 의원은 “일본은 지금 조선 땅에 총독부를 다시 세워 믿을 만한 총독을 앉혀뒀다고 축배를 들고 있을지 모른다”고 확인 사살을 했다. 격변하는 국제 질서 속 생존 전략 같은 한가한(?) 논의는 정한론과 총독부 같은 ‘100년 전 유령’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맹목적 반일 감정은 여전하다. 이달 들어 일본 정부가 최고액권인 1만엔권의 인물을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기업인으로 바꿨을 때도 한국의 모 교수는 “일본 식민 지배 전략을 수정하려는 전형적인 꼼수 전략”이라고 비판했고, 많은 언론이 이를 아무 생각 없이 전달했다.

일본 정부가 왜 하필 지금 시부사와라는 기업인을 120년 만에 소환했는지, 경영학의 구루로 꼽히는 피터 드러커가 왜 “경영의 본질을 시부사와를 통해 배웠다”고 했는지, 중국 CCTV마저 그를 “일본을 굴기시킨 인물”이라고 왜 호평했는지 같은 ‘영양가 있는’ 질문은 한반도 경제 침탈에 앞장선 인물이라는 논란에 묻혀버렸다.

야당의 정신적 스승으로 꼽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일본 국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과 금세기 초 식민 지배 35년간이다.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가 걱정했던 일이 지금 한국에서 한창이다.

한때 국내 성인영화업계엔 ‘목적 시리즈’가 유행했다. 등산의 목적, 동창회의 목적 등. 영화 주인공의 진짜 목적은 산이나 친구가 아니었다.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의 반일 노림수도 국익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