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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어디로 갈지 알기 위해서는 오늘 어디에 서 있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에 대한 이해는 미래를 조망하는 데 필수적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부침을 거듭하는 세계 경제의 앞날이 궁금하다면 브래드퍼드 들롱 미국 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20세기 경제사>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듯하다.

[책마을] 20세기 자본주의는 하이에크와 폴라니 '대결의 역사'
저자는 ‘장기 20세기’를 1870년에서 2010년으로 잡는다. 1870년은 자동차, 전화기, 축음기 등이 발명되기 시작하고 2차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적인 생산 방식이 등장한 시점이다. 이와 함께 그 이전에는 연 0.45%에 머물렀던 세계 경제 성장률이 이후 140년간 2.1%로 뛰어올랐다. 미미한 경제 성장을 늘어나는 인구가 흡수해 개개인의 삶이 제자리걸음하던 이전과 달리, 1870년부터 의미 있는 생활 향상이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20세기가 인류 최초로 ‘경제의 세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같은 기적이 가능했던 요인으로 저자는 1억 명이 유럽에서 미국 등으로 이주한 세계화, 에디슨 등의 발명이 체계화된 기업연구소, 효율적 자원 활용을 통해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강된 근대적 대기업의 출연 등을 꼽는다.

이후 장기 20세기는 두 천재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고, 여기에 대한 개입은 부작용이 더 크다’는 하이에크에게 ‘시장 논리만으로 측정할 수 없는 인간적 권리를 공동체가 보장해야 한다’는 칼 폴라니가 맞선다. 저자는 20세기 전반기에 나타난 역사적 비극들은 둘 사이의 균형이 맞지 않을 때 빚어졌다고 풀이한다. 1930년대 대공황은 하이에크적 편향에 따라 정부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과 수요 감소를 방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시즘과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의 등장은 폴라니적 권리를 확대하려는 시도의 빗나간 결과다.

하이에크와 폴라니의 균형은 2차대전 이후 유럽 재건 과정에서 이뤄진다. 소비재와 생산재, 생산요소는 시장에서 배분하지만 각종 복지 제도를 통해 정부가 결과물을 재분배하는 혼합경제가 출현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케인스의 축복 아래 하이에크와 폴라니가 결혼했다’고 표현하면서, 이때를 20세기 들어 인류가 추구한 유토피아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로 평가한다.

여기까지 보면 알 수 있듯 저자는 케인스와 미국 민주당, 유럽 사회민주주의에 상당한 애정을 품고 있다. 스스로도 ‘1983년 대학을 졸업해 직접 겪은 시대에 균형 잡힌 관점을 갖지 못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정부 비효율과 통화정책 실패에 따른 물가 상승 이전에 하이에크적 오만의 결과로 치부한다. “시장의 승리를 위해 국민들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파 전반에 퍼져 있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세계 각국 정부가 충분한 대처를 하지 못한 것도 이 같은 편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2010년을 장기 20세기가 마무리되는 기점으로 잡은 이유들은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금융위기로 미국 등 서구가 이전의 2%대 성장을 구가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지만, 2020년대 들어 미국 경제와 기업들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기후위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종교적 폭력성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도 20세기의 끝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는 부족해 보인다. 그 이상의 비관과 폭력이 20세기의 정중앙을 관통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 책 후반부가 정치 팸플릿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다.

하지만 저자는 책 곳곳에서 독창적이고 통찰력 있는 분석과 사례를 제시한다. 자유방임을 통해 1920년대의 성공을 이끌어낸 미국 정부가 대공황 당시 개입을 망설이고, 반대로 냉전이 시작된 1950년대에는 대공황을 극복한 계획경제를 높이 평가해 서구 경제학계에서도 소련이 미국을 압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는 대목 등이다. 6·25전쟁 이후 급격히 늘어난 미국의 군비 지출이 최저 수요와 고용을 보장해 대공황 재연의 공포를 일소하고, 마셜플랜 종식에 따른 유럽 경제의 충격을 상쇄했다는 부분도 흥미롭다.

140년의 역사를 폭넓은 시야로 조망했지만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더라도 쉽게 이해할 만큼 충분한 설명과 예시를 들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위트 있는 원문의 읽는 맛을 한국어로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번역도 뛰어나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