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AI 시대에 SK그룹이 살아남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다. 그에 대한 생각을 최 회장이 직접 털어놨다. 지난 19일 제주도 서귀포에서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하계포럼 기자 간담회에서다.

최 회장은 “SK그룹은 AI 인프라(기간시설) 기업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했다. AI 반도체의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생산하는 걸 넘어 AI 데이터센터를 직접 구축하고, AI 구동에 필요한 전기 에너지를 공급·저장하는 데 그룹의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얘기다.
최태원 "SK그룹, AI 인프라 기업으로 진화할 것"

“AI 데이터센터 곧 지어야”

최 회장은 이날 “한국이 AI 인프라 구축 경쟁에서 뒤처지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AI 빅테크에 종속되는 걸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SK가 AI 인프라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11월 1일로 예정된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 결의에 대해서도 “AI 전략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AI는 엄청난 에너지양을 필요로 한다”며 “AI 데이터센터에 공급할 전기를 솔루션화하면 상당한 사업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배터리셀 제조사 SK온은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을 통해 전기를 공급할 수 있고, SK E&S는 수소 등 청정 에너지로 전기를 만드는 데 특화된 만큼 상당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HBM에도 캐즘 올 수 있어”

최 회장의 이날 발언은 SK그룹이 직면한 딜레마와 연관이 깊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면서 ‘떼돈’을 벌고 있지만, 이 같은 의존 구조로는 ‘을’ 신세를 면치 못할 수 있어서다. ‘갑’의 선택을 받으려면 업계 최고의 경쟁력을 항상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막대한 규모의 투자를 끊을 수 없다. 최 회장은 이런 상황을 “행복한 고민”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이유에서다.

최 회장은 “반도체 산업이 집적도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최첨단 패키징 공정 등을 위한) 설비 투자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첨단 반도체 공장을 하나 짓는 데 20조원 넘게 들어가고, 그중에서도 HBM에 돈이 가장 많이 든다”고 했다. 이어 그는 “반도체 투자를 대폭 늘렸다가 전기차 ‘캐즘’(일시적인 대중화 지체 현상)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며 “이런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정부 지원 등 적절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상속세 논의, 디테일이 중요”

올해 3년 임기의 대한상의 회장 연임에 성공한 최 회장은 상속세 개편 논의에 대해서도 소신 발언을 내놨다. 그는 “50%냐, 40%냐 같은 퍼센티지(세율)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업들이 각자 사정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디테일’(세부 사항)에 집중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컨대 상속세 납부 시점을 5년 정도 늦출 수 있다면 그동안 기업인이 경영에 집중해 주식 가치를 끌어올리고, 5년 뒤에 주식 일부를 팔아 상속세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AI 전사’를 키우기 위한 교육을 초등교육 과정부터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연내 대한상의 명의로 ‘AI 국가 전략’ 보고서를 정부에 건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서귀포=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