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겨울 나그네'는 생의 마지막 길을 나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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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강성곤의 아리아 아모레
슈베르트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中 '보리수'
무능을 심판받고 실연까지 당한 존재들을 묘사
슈베르트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中 '보리수'
무능을 심판받고 실연까지 당한 존재들을 묘사

슈베르트(F.Schubert,1797~1828,墺)야말로 독일 가곡을 예술의 경지로 확실히 끌어올린 주인공이다. 모차르트보다도 더 짧은 31살의 인생에서 무려 603곡의 리트를 남겨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고봉이다. 가곡왕(歌曲王)이 그의 별칭일 정도이니.

“성문(城門)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었네/ 수많은 사랑의 말들을 가지에 새기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곳을 찾았었지/ 오늘도 밤이 깊도록 헤매고 다녔다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지/ 그러자 가지가 바스락거렸네, 마치 나를 부르듯이/ 내게로 오게나, 친구여/ 여기서 이제 안식을 찾게나/ 차가운 바람이 자꾸만 내 뺨을 때리고 있네”
안식을 찾으라는 의미는 동사(凍死), 곧 죽음이다. 밖은 춥고 얼얼한 겨울바람이 분다. 정해진 거처가 없는 이 노정은 이대로라면 생의 마지막이다. 길을 나선 이 청년은 누구며 왜 이 고행길을 가야만 하는 것일까.

독일은 예나 지금이나 장인(匠人), 마이스터(Meister)의 나라다. 쇠⸱나무⸱돌⸱유리 등을 기막히게 다루는 고수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었다. 한 청년이 기술을 배우러 고향을 등지고 떠난다. 마이스터 밑에서 처음엔 도제(Lehrling)가 되어 열심히 배우고 일정 기간 지나면 직인(職人)의 위치에 오르는데 이게 게젤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발전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한다. 연정을 품었던 스승의 딸, 혹은 이웃집 처녀를 뒤로하고 말이다. 보리수의 주인공은 바로 이 애틋한 스토리의 당사자인 것이다. 무능을 심판받고 실연까지 당한 존재들. 그러니 우울한 정조(情調)를 띨 수밖에 없다.

베를린 중심가 이름이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인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붓다가 득도한 보리수는 독일의 보리수와 다르다. 그건 엄밀히 보제수(菩提樹)인데 ‘보리’라는 범어에다 나무 수(樹)를 그냥 붙인 것. 더운 인도와 추운 독일을 유추하면 답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여름에 빨간 열매를 맺는 보리수도 린덴바움이 아니다. 그래서 이건 ‘보리수나무’라고 부른다. 독일 린덴바움은 엄밀히 따지면 피나무에 해당한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