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정오 세운상가 중고카메라 골목에서 20대 외국인 관광객이 중고 카메라를 구매하는 모습. 가게 사장이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다. /사진=김영리 기자
23일 정오 세운상가 중고카메라 골목에서 20대 외국인 관광객이 중고 카메라를 구매하는 모습. 가게 사장이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다. /사진=김영리 기자
"젊은 친구들이 카메라로 사진 찍는 '손맛'을 어떻게 아나 몰라. 요즘 '디카'(디지털카메라) 사러 오는 친구들은 나보다 기종도 더 잘 알아요. 서로 찍어보면서 고르는 모습 보면 신기하죠."

세운상가에서 음향·영상 기기를 취급하는 가게를 운영하는 '신승전자'의 김한기(54) 씨는 이같이 말했다. 전문 촬영 장비를 다루는 이 가게 구석에는 오래된 휴대용 디지털카메라들이 전시돼있다. 대부분 2000년대 초반에 출시됐던 제품이다. 2016년 카메라 사업을 완전히 접은 삼성의 디지털카메라도 보였다.

김 씨는 "우리 가게는 음향 장비, 영상 장비 납품이 주력 사업"이라면서도 "최근에는 '빈티지 카메라 있냐'며 가게를 방문하는 젊은 친구들이 꽤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작동 안 되는 1만원짜리부터 캐논 등 인기 브랜드의 '풀세트(배터리, 메모리 카드, 충전 케이블이 모두 들어있는 구성)'는 20만원대도 있다"고 전했다.

이어지는 'Y2K(세기말)' 열풍을 타고 최근 세운상가 중고 카메라 가게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20~30대가 중고 카메라를 찾아서다.

"틱톡 보고" K-디카 사러 온 관광객

23일 오후 세운상가 중고 카메라 가게의 모습. /사진=김영리 기자
23일 오후 세운상가 중고 카메라 가게의 모습. /사진=김영리 기자
23일 정오께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2층. 중고 카메라 전문 '종로디지탈'을 운영하는 이규태(65) 씨는 싱가포르인 여행객 세리(24) 씨와 아지(24) 씨를 응대하고 있었다.

세리 씨는 "여행 중 틱톡에 한국의 '핫플'(명소)로 떠서 구경 왔다"며 "10만~15만원대의 중고 카메라를 기념품으로 사 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흐릿하고 뿌연 사진이 유행"이라며 "화소수가 낮은 저화질 제품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지 씨도 "세븐틴 콘서트 때문에 한국에 방문했다"며 "스마트폰 카메라보다 화질은 안 좋지만 빈티지 카메라만의 매력이 있다"며 "뉴진스도 뮤비에서 이런 빈티지 카메라를 들지 않았냐"고 말했다. 이어 "여행하는 모습을 빈티지 카메라로 담으면 추억이 될 것 같다"며 구형 디지털카메라들을 둘러봤다.

가게를 운영하는 이규태 씨는 중고 디지털카메라 매입을 통해 팔 물건을 구한다. 본체만 갖고 있더라도 충천 케이블 등을 구할 수 있는 제품이라면 매입하고 있다. 매입한 카메라의 작동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배터리와 메모리카드 등을 추가해 바로 사용할 수 있게 손 본 뒤 10만~20만원대의 가격으로 책정하고 판매하는 식이다.

이 씨는 "손님 대부분이 2030"이라면서 "과거에는 촬영 업계 종사자를 대상으로 중고 촬영 장비를 판매했는데 1~2년 전부터 휴대용 중고 디지털카메라 판매가 주력 사업이 됐다"고 전했다. 손님이 많을 땐 디지털카메라만 하루 10대도 팔린다고도 덧붙였다.

다만 "잘 팔린다고 해서 많이 구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니다"라며 "간간이 카메라를 팔러 오시는 손님들로부터 물건을 구해 파는 수준이라 물량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23일 오후 세운상가 중고 카메라 가게에서 카메라를 고르는 사람들. /사진=김영리 기자
23일 오후 세운상가 중고 카메라 가게에서 카메라를 고르는 사람들. /사진=김영리 기자
이 씨에 따르면 캐논, 소니, 니콘, 삼성이 2000년대 초반에 출시했던 디지털카메라들이 가장 인기다. 이 씨는 "어제도 거의 새제품에 가까운 삼성 카메라가 20만원에 바로 팔렸다"며 "상태 좋은 상품들은 거의 매입하자마자 판매되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유행이 퍼지며 중고 디지털카메라의 시세도 전반적으로 오른 모양새다. 이날 세운상가를 찾은 20대 대학생 박모 씨도 "예산 10만원 내외로 살 수 있는 디카를 찾고 있다"며 "작년에는 10만원에 구매했다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오늘 둘러보니 20만원대도 있어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에는 확실히 카메라의 색감이나 복고 '감성' 때문에 스마트폰까지도 아이폰6S, XS 등 구형 모델을 찾는 친구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화질 안 좋을수록 좋아"

최근 아이돌 그룹의 무대가 이끈 복고풍 컨셉 열풍에 종로·남대문 일대 중고 카메라 가게들이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 /사진=뉴스1
최근 아이돌 그룹의 무대가 이끈 복고풍 컨셉 열풍에 종로·남대문 일대 중고 카메라 가게들이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 /사진=뉴스1
업계에서는 대중문화계에서 부는 복고 유행이 이를 견인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디토(Ditto)' 뮤비에서 2000년대에 봤을 법한 디지털 캠코더를 드는가 하면, 최근 일본 도쿄돔에서는 1980년대 일본 유명 가요 '푸른산호초'를 불러 복고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아이돌 그룹 뉴진스가 대표적이다. 복고 열풍이 전문 취미로만 여겨지던 카메라 시장에까지 번진 것이다.

세운상가 중고 카메라 가게 사장들에 따르면 디지털카메라를 찾는 2030들은 '가격 대비 뛰어난 성능'을 찾는 보편적인 소비 행태를 따르지 않는다.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물씬 드러낼 수 있는 화소수가 더 낮은 것이나, 초점이 잘 안 맞는 제품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구형 카메라들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것과 관련, 전문가들은 이 카메라가 젊은 세대에게 신선한 경험이 되는 동시에 위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현 2030에게 구형 디지털카메라는 어린 시절 부모님들이 쓰던 물건일 것"이라며 "주도적으로 사용해본 경험은 없으니 새로운 경험이 되면서, 동시에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히 카메라와 스마트폰 등 휴대용 전자기기는 최근 20~30년간 가장 빠르게 발전한 물건 중 하나"라며 "시대의 흐름을 체감하기 쉬운 물건이라는 점에서 복고 열풍 속에서 유독 인기를 끄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