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대체어 없는 '극단적 선택' 폐기
“그곳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었다. 나는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모든 희망을 버리고 무거운 돌문을 삐걱 열고 들이민 한 발, 단테의 ‘지옥’이다.

지옥이 <신곡>에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기가 태어나지 않아 온 나라가 걱정인데 주어진 생명을 스스로 멸하는 사람도 있다. 하루 평균 37명 넘는 사람이 세상을 등진다. 민원에 시달리던 공무원, 학부모의 압박에 무릎 꿇은 교사, 모멸을 못 견뎠다는 배우…. 이들에겐 지금 이곳이 지옥이었다. 이들의 죽음을 전한 신문과 방송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했다.

용어가 자살 방아쇠는 아냐

지난해 한국의 자살자는 1만3770명. 교통사고 사망자(2551명)의 다섯 배를 넘었다. 2021년 1만2252명, 2022년 1만3352명 등으로 지속 증가했다. 게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9년간 자살률 1위다.

언어 규범은 보통 사회가 질주하는 보폭보다 느리게 변한다. 뒤따라간다. ‘자살’이란 말을 신문 뉴스에서 금기시한 것은 2004년이다. 10여 년 뒤 ‘극단적 선택’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본래 자살이란 단어는 한국어에 없었다. ‘자진(自盡)’ ‘자결(自決)’을 많이 썼다. 자살은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선생이 영어 ‘suicide’를 번역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진, 자결에 새로운 자살이 그리고 극단적 선택이 더해졌다.

극단적 선택은 저널리즘 언어다. 완곡어법으로 사람들이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독자와 시청자의 순응성이 또 다른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지 않게 차단한다. 하지만 ‘자살’을 ‘극단적 선택’으로 바꾸었다고 자살자가 줄었다는 기사와 분석 자료를 본 적은 없다. 베르테르 효과와 달리 과학적 검증은 없다는 얘기다.

새 대체어 마련해야

두 달여 전 언론중재위원회가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보도에 시정 권고한다고 발표했다. 극단적 선택이 죽음을 자기주도적 결정 사안으로 여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쓰지 말라고 했을 뿐 대안은 없었다는 점이다. 기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언어가 존재의 외피를 드러내 인지 조화를 이룬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건에 딱 맞는 언어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기자협회가 2018년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에서 자살 말고 사망, 숨지다 등을 쓰라고 권고했을 때 언론이 현장 언어로 극단적 선택을 찾아낸 것은 그래서다.

용어가 자살의 트리거는 분명 아니다. 그럴지라도 언론의 책무는 가볍지 않다. 1만 명 중 한 명이라도 지옥문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면! 독배라도 들어야 한다. 공은 다시 언론으로 넘어왔다. 대체어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름 짓기 하는 동물 아닌가. 한 번 실패했다고 또 실패하란 법은 없다. 자기 결정을 합리화한다는 극단적 선택 대신 ‘무희망 사망’ ‘자기 사망’ ‘제2사망’은 어떨까.

세상에 개인적 자살은 없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자살 생각자는 스스로 지옥에서 못 벗어난다. 베르길리우스의 손길이 필요하다. 손끝에 걸린 별이 이끄는 대로 가다 보면 새벽이다. 그러면 또 살아진다. 친구, 이웃, 사회복지사 모두가 베르길리우스다. 언어는 거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