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으로 인해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파리. 그곳에서 온 프랑스 최고의 무용수들이 한국에서 축제같은 무대를 펼쳤다. <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 갈라 2024>에서 발레리나 박세은과 그의 동료 무용수들은 18개의 레퍼토리를 9개씩 프로그램A와 B로 나눠 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다.

프로그램A와 B의 포문을 처음 연건, 2023년 전막 공연 <지젤>로 내한했을 때 에투알에 임명된 발레리노 기욤 디오프였다. 매 공연 첫무대(들리브 모음곡 파드되, 돈키호테 3막 파드되)마다 작품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채 긴장한 움직임, 착지 실수로 남녀 2인무의 매력을 잘 살려내지 못한 건 못내 아쉬웠다.

첫 무대의 당혹스러움을 감탄으로 바꿔낸 구원투수는 박세은이었다. 그는 두 프로그램 모두 2번째 선수로 나서며 '월드 클래스'는 분명 다르다는 점을 객석에 완벽히 각인시켰다. 이후 진행된 갈라에서는 박세은을 비롯한 발레단의 뛰어난 무용수들이 저마다 매력을 충분히 분출했다.
'파리의 에투알' 박세은… 월드 클래스 발레를 선사해줬다
박세은은 프로그램A에서 <랩소디 파드되>를 선보였다. 안무가 프레데릭 애쉬튼이 러시아 발레를 오마주해 영국 여왕에게 1980년 선물한 것인데, 매년 프랑스와 영국을 대표하는 발레단이 변주하면서, 독특한 스타일을 갖춰나가는 작품이다. 박세은과 제레미 루 퀘르는 아이스링크를 연상시키는 듯한 무대 위를 마찰력 없이 미끄러져 나갔다. 선택적으로 중력을 받아들이는 듯한 가뿐한 도약 역시 탁월했다.

프로그램B의 두번째 작품인 <르 파르크 3막 파드되>는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컨템포러리 작품으로 박세은이 오랜 파트너인 폴 마르크와 호흡을 맞췄다. 하얀 가운 차림의 두 남녀가 한밤중 마주치고 서로를 어루만지듯 춤을 추는 모습에 애틋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발레리노와 입을 맞춘 채 하반신을 90도 가량 들어올려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발레리노에게 의지한 박세은. 그리고 허리에 온 힘을 집중시켜 팽이처럼 빠른 속도로 회전해 인체의 한계를 넘어버린 폴 마르크에게서 전율이 느껴졌다.
'파리의 에투알' 박세은… 월드 클래스 발레를 선사해줬다
프로그램A 공연에서는 무용수들이 천재 작곡가와 천재 안무가의 '밀당(밀고 당기기)'을 제대로 표현해냈다는 것을 수차례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가 '가구 같은 편안함'을 추구하며 작곡한 그노시엔느 음악에 네덜란드의 개성파 안무가 한스 판 마넨이 안무를 입힌 <세 개의 그노시엔느>에서는 유독 그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발레리나 레오노르 볼락과 발레리노 기욤 디오프는 섬세하면서도 절도있는 동작으로 무대를 누볐다. 네덜란드 발레단이 이 작품을 표현했을 때는 훨씬 더 과감하고 두드러진 동작이었다면, 프랑스 발레는 이를 좀 더 순화해 우아미를 챙겼다. 느린 선율에 버티는 동작이 많아 자칫 근력자랑으로 흐를 뻔했던 무용을, 두 무용수가 아테네에서 이뤄진 신들의 올림픽마냥 경이롭게 풀어냈다.
'파리의 에투알' 박세은… 월드 클래스 발레를 선사해줬다
<정교함의 짜릿한 선율>은 폭발적인 슈베르트 교향곡 9번 4악장에 미국 현대무용가 윌리엄 포사이스가 더욱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안무로 고안한 작품이다. 박세은을 비롯한 발레리나 3인과 발레리노 2인은 슈베르트의 열정을 포사이스의 과감함으로 뒤덮는 신기에 가까운 춤을 보여줬다.
'파리의 에투알' 박세은… 월드 클래스 발레를 선사해줬다
프로그램B는 프랑스의 국기 컬러인 파랑, 하양, 빨강을 형상화한 듯한 작품 구성을보였다. <몸짓 중 푸른 색의 정신 파드되>에서 무용수들은 신새벽과 같은 푸른 배경과 물결을 형상화한듯한 푸른 의상을 입으며 바닷속 생명체처럼 유영했다. <백색 모음곡 중 아다지오 파드되>에서는 눈이 부시게 하얀 빛깔이 느껴졌고, 피날레 작품인 <내가 좋아하는>에서는 6명의 무용수가 피를 연상케 하는 짙은 붉은 색 의상을 입고 춤을 춰 프랑스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3색의 요소를 골고루 감지할 수 있었다. 닷새간 네 번 이뤄진 이번 공연을 통해 에투알의 왕관이 기량만 뛰어나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그들이 표현하고 추구하는 예술성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