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모씨가 지냈던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반지하 임대주택.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김모씨가 지냈던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반지하 임대주택.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매년 이맘때 장마철이 오면 변기가 막혔지만 수리해도 그때뿐이었어요. 반지하 집이라 정화조와 변기 높이 차이가 없는 탓에 해결되지 않았죠. 장마철이면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어요."

경기 수원시 팔달구에 사는 60대 김모씨는 과거 살던 반지하 임대주택에 대해 이같이 회상했다. 김씨는 최근 신축 빌라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임대주택을 지상층으로 옮기자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주거 상향 이주 지원 사업 담당자의 끈질긴 설득에 슬쩍 넘어간 덕분이다.

LH 매입임대주택, 수도권에만 1085가구 '반지하'

LH는 김씨에게 이주가 가능한 인근 임대주택들을 선보였고, 임대료도 2년간 기존 수준으로 동결을 약속했다. 이에 김씨는 기존에 살던 곳에서 약 1.5㎞ 떨어진 준공 5년 차 신축 빌라를 선택했다. 전용면적은 76㎡로 이전 반지하 임대주택(전용 39㎡)과 비교해 약 2배 넓은 곳이었다.
김씨가 거주하던 반지하 임대주택 화장실에 역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김씨가 거주하던 반지하 임대주택 화장실에 역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김씨가 반지하를 나와 지상으로 이사한 것은 LH의 주거 상향 사업 덕분이다. LH는 반지하 임대주택 입주자를 지상층으로 이주시키는 주거 상향 사업을 하고 있다. LH는 아파트 외에도 도심 빌라와 다가구주택을 매입 또는 임차해 임대주택으로 공급하는데, 이 과정에서 반지하 임대주택도 늘어났다.

LH가 보유한 매입임대주택 17만 가구 가운데 반지하 주택에 사는 가구는 2022년 6월 기준 1810가구에 달했다. 서울이 716가구, 경기와 인천이 1085가구로 수도권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도심 임대 수요는 늘고 있지만, 임대 아파트를 새로 지을 땅이 부족해 빌라 등으로 대체했던 탓이다.
변기가 역류했던 김씨의 옆집은 공가 조치가 완료된 뒤 결국 화장실 배관을 아예 막는 공사를 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변기가 역류했던 김씨의 옆집은 공가 조치가 완료된 뒤 결국 화장실 배관을 아예 막는 공사를 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이에 LH는 지난해부터 입주자 주거 여건 개선을 위해 반지하 임대주택을 없애고 있다. 지난달까지 LH가 소유한 반지하 임대주택 1810가구 가운데 688가구(38%)를 지상으로 이주시켰다. 민간이 소유한 반지하 임대주택에서도 3726가구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주 거부 사례도 많지만…꾸준한 상담과 지원으로 독려"

다만 김씨의 사례처럼 이주가 쉬운 일은 아니다. LH 관계자는 "고령층의 경우 살던 곳을 떠나는 데에 거부감이 크다"며 "기존 거주지에서 1㎞만 떨어져도 친구들을 만나기 어렵다며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반지하보다 비싼 지상층 임대료도 부담이다. 일례로 김씨가 거주하던 반지하 임대주택은 보증금 50만원, 월 임대료 2만원에 거주할 수 있었다. 같은 건물의 지상층은 보증금이 300만원 이상으로 불어나고 월 임대료도 8만원 수준으로 늘어난다.

이에 LH는 '찾아가는 이주 상담'을 통해 이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 정보를 제공하고 반지하 임대주택에서 이사하는 경우 주택을 우선 배정하는 등 주거 상향을 독려하고 있다.
'찾아가는 이주 상담'을 통해 반지하 입주자에게 주거 상향 상담을 하는 모습. 사진=LH
'찾아가는 이주 상담'을 통해 반지하 입주자에게 주거 상향 상담을 하는 모습. 사진=LH
일시에 임대료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존 반지하 임대조건을 2년간 유지하고, 이사비도 지원해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고 있다. 2년 뒤 늘어난 보증금을 거주민이 감당할 수 있도록 지자체 지원제도 등도 소개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이주한 김씨는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살던 곳을 떠나려니 두렵기도 하고 아쉬움도 컸다"면서도 "정작 이사를 오니 주거 환경이 너무나 좋아졌다. 볕이 잘 들어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고 공기도 상쾌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털어놨다. 김씨의 부인도 "이사 소식에 친정아버지가 다녀가셨다"며 "집을 보고는 '이제야 사람답게 산다'고 좋아하셨다"고 귀띔했다.

주거 환경이 대폭 개선되면서 불가피한 사정으로 보육원에 맡겨진 손자도 데려올 길이 열렸다. 그는 "딸이 남편의 폭력 때문에 이혼했는데, 자녀 양육권을 모두 남편 쪽에서 가져갔다"며 "소식이 끊긴 채 지내다 손자가 아동학대로 보육원에 간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김씨가 손자를 데려오려면 관할 기관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LH의 주거상향 사업을 통해 반지하 입주민이 이사한 임대주택 모습. 사진=LH
LH의 주거상향 사업을 통해 반지하 입주민이 이사한 임대주택 모습. 사진=LH
그는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지낼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하는데, 좁고 낡은 반지하 집으로는 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웠다"며 "LH가 주거 상향을 제안했을 때 이러한 사정을 설명해 넓고 좋은 집을 받았다. 딸과 합가도 했고, 이제 심사만 남겨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안락한 집에서 네 가족이 함께 지낼 날을 기다리고 있다.

LH 관계자는 "주거 상향은 단순히 숫자에 매몰돼 반지하 입주자를 지상으로 보내는 사업이 아니다"라며 "입주자 개개인이 처한 상황을 따져 최선의 거주 대책을 제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입주자와 주거 상향을 상담할 때면 이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을 약 40~50건 정도 준비한다"며 "이주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돕기 위해 전국에 59개소의 이주 지원 센터도 운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주거 상향과 별개로 LH는 반지하 임대주택에 차수판, 역류방지 장치, 침수 경보장치 등 침수 방지 시설 설비를 완료해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고 있다. 입주자가 떠나 공실이 된 반지하 임대주택은 지자체, 주거복지 관련 시민단체의 긴급구호시설, 입주민 커뮤니티 시설, 공유창고 등으로 활용한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