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리브에 폭소, 노래엔 어깨가 들썩…기립박수 끌어낸 조영숙
관객을 가지고 노는 90세 명인의 무대…국극 '조 도깨비 영숙'
"아이고 눈으로는 못 보겄네 / 아이고 두 눈으로 못 보겄네 / 꽃송이가 한 송인가 나비가 한 쌍인가∼"
여성국극의 '산 증인' 조영숙(90) 명인이 노래를 부르자 관객들이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힘껏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객석 이곳저곳에선 "얼쑤!", "잘한다" 같은 우렁찬 추임새가 나왔다.

조 명인은 뜨거운 환호에 신명이 난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굽은 등허리로 덩실덩실 춤을 췄다.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 '조 도깨비 영숙'은 73년간 국극 외길 인생을 걸어온 조 명인의 노련미가 돋보이는 무대였다.

창이면 창, 춤이면 춤, 연기면 연기 어느 하나 모자랄 것 없이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며 관객을 쥐락펴락했다.

'조 도깨비 영숙'은 밴드 이날치의 베이시스트 장영규와 정가 가수 박민희가 국극 '선화공주'를 현대적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제목에 '도깨비'가 들어간 이유는 과거 조 명인의 별명이 도깨비였기 때문이다.

도깨비처럼 무엇이든 기막히게 잘한다는 의미로 동료들이 붙여줬다고 한다.

조 명인은 이 작품에서 서동 왕자와 선화공주, 석품, 철쇠, 왕 등 5명의 배역을 맡으며 별명 값을 톡톡히 했다.

주로 남자 역할을 맡아온 그가 여성 캐릭터인 선화공주를 소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관객을 가지고 노는 90세 명인의 무대…국극 '조 도깨비 영숙'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2장은 미리 녹화한 영상을 4개의 스크린에 띄워 보여주고, 3∼4장은 영상과 라이브 무대를 결합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조 명인은 1장에서 모든 역할을 홀로 소화한다.

한 스크린에서 왕을 연기하는 조 명인의 대사가 끝나면 다른 스크린에서 선화를 연기하는 조 명인이 등장한다.

캐릭터에 따라 말투와 표정, 노래 방식이 달라지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지엄한 군주에서 순애보를 간직한 청년, 그를 위로하는 얌전한 공주, 공주에게 음흉한 마음을 품은 신하를 자연스레 오간다.

하이라이트는 조 명인이 실제로 무대에 서서 제자 박수빈, 변민지, 한혜선, 황지영과 함께 극을 이끌어가는 4장이다.

조 명인이 스태프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올 때부터 관객들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시선을 고정했다.

낚싯바늘처럼 휘어진 허리와 힘겨운 걸음걸이를 보며 그가 무대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걱정하던 찰나, 조 명인의 우렁한 창이 시작됐다.

"내 팔자 개를 주랴 / 개만 못한 내 팔자야 / 친구 하나 잘못 만나 경만 치고 혼만 났네 / 그래도 못 잊을 건 친구 밖에 또 있느냐…"
무대가 떠나갈 듯한 목청에 객석에서는 '우와' 하는 감탄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관객을 가지고 노는 90세 명인의 무대…국극 '조 도깨비 영숙'
그가 4장에서 맡은 역할은 서동의 친구인 철쇠. 조 명인의 특기인 코믹 캐릭터로, 쉴 새 없이 유머러스한 대사를 던진다.

조 명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즉석에서 만들어낸 애드리브를 몰아쳤다.

여기서 반드시 웃음이 터질 것이라는 자신감과 그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 없이는 시도하기 어려운 대사들이다.

그의 예상대로 관객들은 조 명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배꼽이 빠질 것처럼 웃었다.

멀찍이서 서동과 선화를 바라보며 흠칫 놀라는 모습에도 홀린 듯이 폭소가 나왔다.

극이 끝날 무렵 그가 배우들과 나란히 서 '서동요'를 부를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허리를 세우고 객석을 바라보는 조 명인의 눈빛이 묵직한 감동을 선사했다.

공연을 마친 조 명인이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를 건네자 관객들은 대극장에서나 들을 법한 큰 소리의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하나둘 일어섰다.

쇠락의 길로 접어든 우리의 전통 국극을 묵묵히 지켜온 예인이자 구순의 나이에도 뜨거운 열정을 불사른 어른을 위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관객을 가지고 노는 90세 명인의 무대…국극 '조 도깨비 영숙'
박수가 멈추지 않아 조 명인은 한참이나 기다린 후에야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감정이 북받친 듯 목소리가 떨렸고, 제자들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여우비가 내리고 무더운 날씨에도 찾아준 관객들께 감사드린다"고 입을 뗀 그는 "국극이 절대 사라지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그가 퇴장한 후에도 환호와 박수가 이어지자 조 명인은 다시 무대에 올라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관객들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조금만 젊었으면 좋았을 걸…이제 나 들어가야 해요"라고 말해 객석을 또 한 번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공연은 27일 한 차례 더 이어지며, 원캐스트로 진행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