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햄릿'서 클로디어스 역…"10년 만에 출연, 몸이 정화된 느낌"
오디오북 '박태원 삼국지'도 낭독…1년 걸쳐 1천233명 홀로 연기
길용우 "햄릿·삼국지, 끊임없이 살아나는 고전의 힘 대단해"
"하늘이여, 내게 빗물을 내려다오! 피에 젖은 이 두 손을 눈처럼 하얗게 씻어다오. 나에게 자비를! 부디 용서를!"
선왕인 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른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는 죄를 참회라도 하듯 신에게 자비를 구한다.

그러나 이내 "허나 나는…인간이다! 나는 살고 싶다…살아야겠다"라며 선악의 딜레마에서 스스로를 구원한다.

클로디어스 역을 맡은 배우 길용우가 장문의 독백을 절규하듯 쏟아내자 관객은 숨을 죽였다.

형을 제거하고 햄릿의 어머니인 형수 거트루드를 왕비로 맞은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의자를 분신처럼 쓰다듬었다.

지난 20일 서울 홍익대학교대학로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손진책 연출 연극 '햄릿' 2막의 문을 열면서다.

길용우 "햄릿·삼국지, 끊임없이 살아나는 고전의 힘 대단해"
◇ 연극서 출발해 TV 스타로…"무대 날아다니는 전무송·박정자 존경스러워"
막이 내리고 공연장에서 만난 길용우는 "가장 고민한 장면이어서 꿈을 계속 꿨다"며 "클로디어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독백이고 2막의 첫 장면이어서 어떻게 스타트를 끊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실제 그의 대본에서 이 장면 대사엔 여러 종류의 펜으로 동그라미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 독백에는 신과 하는 대사, 자기와 하는 대사, 영혼에 하는 대사가 있어요.

차 타고 다니면서, 자면서도 연습했는데 정답은 모르겠어요.

그만큼 어려웠죠."
길용우가 연극 무대에 오른 건 10년 만이다.

1976년 MBC 9기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조선왕조 오백년', '서울뚝배기' 등 100여편의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연기 인생 출발점은 연극이었다.

1975년 연극 네 편을 연출한 그가 같은 해 배우로 처음 출연한 작품도 윤석화와 함께 한 민중극단 연극 '꿀맛'이었다.

그는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었기에 매일이 즐겁다"며 "무대에선 역할을 끝까지 책임지고 에너지를 잘 분배해 쏟아내야 한다.

끊어가는 컷도, 엔지(NG)도 없다.

이 작품을 통해 몸이 싹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정화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함께 출연하는 이호재, 전무송, 박정자, 손숙 배우 모두 80대"라며 "이런 분들이 스탠바이도 먼저 하시고, 무대에서 날아다니시는 걸 보면 존경스럽다.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에 정말 배워야 할 점이 많다.

무척 대단한 후배들도 많아 우리나라 연극, 뮤지컬계가 참 기대된다"고도 했다.

길용우 "햄릿·삼국지, 끊임없이 살아나는 고전의 힘 대단해"
◇ 91시간 분량 '삼국지' 낭독…"지금 시대 통하는 지혜 담겨"
길용우는 최근 배우로, 낭독자로 동서양 고전을 횡단하는 경험을 했다.

'햄릿'이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601년 창작한 서양 대표 고전이라면, 직접 낭독한 '삼국지'(三國志)는 동양 최고 고전으로 꼽힌다.

그는 지난 4월 출시된 오디오북 '길용우가 읽는 박태원 삼국지'(커뮤니케이션북스·개정판)에서 원고지 약 9천매·91시간 29분 분량, 1천233명의 등장인물을 홀로 소화했다.

이 오디오북은 나관중의 삼국지를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1909~1986)이 원전에 충실하게 옮긴 번역본이다.

흔히 우리가 접하는 삼국지는 나관중이 정사(正史) 삼국지와 민간 설화 등을 재료로 창작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뜻한다.

1년에 걸쳐 녹음한 길용우는 "삼국지는 학생 때 건성으로 읽어 정독한 건 처음"이라며 "박태원 번역본은 이문열 작가가 해설을 더해 옮긴 삼국지와 달리 원본 그대로를 완역해 쉽게 들리도록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책 10권(2008, 깊은샘)을 받았는데 페이지를 프린트해 가며 무척 집중해 읽었다"고 떠올렸다.

길용우 "햄릿·삼국지, 끊임없이 살아나는 고전의 힘 대단해"
그가 중후한 음색으로 낭독한 오디오북은 121개 파일이 담긴 USB와 인물과 명장면 등을 해설한 가이드북으로 구성됐다.

명쾌한 발음과 실감나는 연기에 어느 장을 펼쳐 들어도 몰임감을 안긴다.

그러나 '해신', '대조영' 등의 사극에 출연한 반세기 연기 경력에, 다수 다큐멘터리에서 내레이션을 한 길용우도 1천명이 넘는 인물을 소화하는 건 녹록지 않았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 소열제(유비)와 오호대장 관우, 이들과 의형제를 맺은 장비, 촉한의 승상 제갈량 등 각기 캐릭터를 분석하고 음색과 톤을 달리해야 했다.

길용우는 "체격이 크고 힘이 센 사람, 야비한 사람, 지략가처럼 신뢰를 주는 사람 등으로 구분해 연기했다.

초선 같은 여인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건 어려웠다"며 "감기에 걸리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녹음하다 중도에 포기한 적도 있다.

한결같이 좋은 소리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삼국지에는 정치, 경영적인 측면이든 처세, 리더십 등 인간관계까지 지금 시대에 통하는 많은 지혜가 담겼다"며 "우리의 모습과 삶을 반추할 수 있어 많은 분들이 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어린이들에게도 읽히는 삼국지와 400년이 넘도록 재해석 되는 햄릿 등 고전의 힘을 강조했다.

"고전은 새로운 환경과 만나도, 역사가 흘러도 끊임없이 살아남아요.

옛 것을 현실에 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고전의 힘이 대단하다고 새삼 깨닫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