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와인에 테루아가, 발레엔 땅의 기운 받는 '아 테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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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단비의 발레의 열두 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여름은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시인 이육사(1904∼1944)가 포도알 안에 독립투사로서의 전설과 꿈을 담은 것처럼, 사람들은 이 뜨거운 계절이 지난 후에 얻을 수확을 기다리며 각자의 열망과 꿈을 담는다. 은유가 아닌 직관적으로 포도가 알차게 영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와이너리 관계자들일 것이다. 내리쬐는 햇볕 한 줌, 내리는 비 한 방울에 울고 웃는 건 그게 포도, 와인의 맛과 품질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때를 벗어나 비가 내리면 그 해의 와인의 품질과 향미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들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게 테루아(terroir)이다. '테루아'라는 말이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하는 테르(terre)에서 유래된 만큼 좁게는 포도가 자라는 토양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와인 관계자들은 토양의 상태와 기온이나 강수량, 일조량 등 기후, 지형은 물론, 포도나무를 둘러싼 미생물과 동식물 같은 생물들, 포도 재배 방식과 와인 양조 방식 등 와인을 만드는 활동까지 통틀어 테루아라고 부른다. 어쨌든 와인의 맛과 풍미는 간단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테루아는 아주 중요한 근간이 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특히 지금처럼 포도가 무르익는 여름에는 햇볕을 많이 받아야 한다.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지중해 지역이 와인으로 유명한 건 작열하는 태양 덕분일 것이다. 와인 신생지로 각광받는 아르헨티나, 칠레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들은 고른 기후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어느 해에 생산되는 와인이든 고른 맛을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좋은 와인의 뒤에 테루아가 있다면 아름답고 화려한 발레의 기술과 표현 뒤에는 테르가 있다. 앞서 언급한 ‘땅’, 바로 그것이다. 발레는 기본적으로 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향해 추는 춤이다. 발레만큼 ‘날아다닌다’라는 표현이 적확한 춤도 드물다. 공중에서 수행하는 발레의 동작들을 앙 레르(en l'air)라고 부르는데 [관련 칼럼 보기] 같은 동작에서 땅바닥에 할 경우 아 테르(á terre)라고 부른다. ‘아 테르’는 ‘땅에서, 바닥에서’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한쪽 다리로는 지탱하고 서고, 다른 쪽 다리는 들어서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롱 드 장브 앙 레르(rond de jambe en l'air)’라고 부른다면, 이 동작에서 들고 있던 다리를 땅바닥으로 내려서 발끝으로 원을 그리면 ‘롱 드 장브 앙 테르(rond de terre)'라고 부른다. 즉, ‘다리로 공중에서 원을 그리는’ 앙 레르 동작이 ‘땅에서 원을 그리는’ 아 테르 동작이 되는 것이다.
보통 아라베스크(arabesque) 동작은 한 다리로 지탱해서 서고, 다른 다리를 들어 앞이 뒤로 곧게 뻗는 것을 가리키지만 이 동작도 아 테르 상태에서 구사할 수 있다. 들고 있는 다리를 바닥으로 내려놓은 경우 아라베스크 아 테르라고 부른다. 아라베스크 아 테르는 작품 속에서 어떤 장면의 준비 혹은 마무리 자세로 쓰일 수 있다. 발레에서 동작을 시작하기 전 취하는 준비자세를 프레파라시옹(préparation)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프레파라시옹은 아 테르 동작이다. 땅을 제대로 딛고서야 그다음에 공중에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발레 공연을 보면 주역들이 등장해서 솔로 무대를 선보일 때 아 테르 상태에서 호흡과 몸을 가다듬은 후 화려한 기술과 폭발적인 감정들을 보여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돈키호테> 3막 결혼식 장면의 그랑 파드되에서 남녀 두 주인공은 유쾌하고 화사한 에너지와 기술들을 선보이기 전에 뒷모습 상태로 서서 웃음 짓는다. 이제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된 기쁨과 앞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은 아 테르로 숨을 고른 뒤 본격적인 전초전을 하객들에게 선보인다. 사람들은 보통 날아다니는 동작에 취하지만, 그 동작이 나오기 전에 땅을 딛는 과정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와인과 발레는 닮은 구석이 있다. 오랜 시간 숙성해야 하는 점, 그리고 신과 인간의 힘이 만나서 완성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테루아에는 기온과 토양, 지형처럼 신이 부여한 요소도 있지만 포도의 재배와 와인을 만드는 방식 등 인간의 노력하고 연구해서 얻게 된 요소들도 있다. 발레도 체형과 체격조건이나 운동능력 등 타고난 요소와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연습량, 감정의 예술적 표현 같은 인간의 노력이 더해져야 완성된다. 기상이변이 속출하면서 지난해 세계 와인 생산량은 6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들린다. 테루아가 흔들린다는 것은 테르가 흔들리는 것, 기본이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후는 자연이 준 요소이지만 그 기후가 변덕을 부리지 않고 온전히 제 성격대로 움직이려면 그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배려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체형을 타고났더라도 연습과 노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고, 공기 속에 날아다니는 춤사위는 땅을 잘 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달리 기후의 변화가 부쩍 느껴지는 2024년의 여름. 좋은 공연 뒤에 풍미 좋은 와인 한 잔을 마시다가 테루아와 테르의 의미를 돌아본다. 테루아와 테르는 근원이다. 근원이 흔들리는 것은 생명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여름은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시인 이육사(1904∼1944)가 포도알 안에 독립투사로서의 전설과 꿈을 담은 것처럼, 사람들은 이 뜨거운 계절이 지난 후에 얻을 수확을 기다리며 각자의 열망과 꿈을 담는다. 은유가 아닌 직관적으로 포도가 알차게 영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와이너리 관계자들일 것이다. 내리쬐는 햇볕 한 줌, 내리는 비 한 방울에 울고 웃는 건 그게 포도, 와인의 맛과 품질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때를 벗어나 비가 내리면 그 해의 와인의 품질과 향미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들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게 테루아(terroir)이다. '테루아'라는 말이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하는 테르(terre)에서 유래된 만큼 좁게는 포도가 자라는 토양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와인 관계자들은 토양의 상태와 기온이나 강수량, 일조량 등 기후, 지형은 물론, 포도나무를 둘러싼 미생물과 동식물 같은 생물들, 포도 재배 방식과 와인 양조 방식 등 와인을 만드는 활동까지 통틀어 테루아라고 부른다. 어쨌든 와인의 맛과 풍미는 간단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테루아는 아주 중요한 근간이 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특히 지금처럼 포도가 무르익는 여름에는 햇볕을 많이 받아야 한다.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지중해 지역이 와인으로 유명한 건 작열하는 태양 덕분일 것이다. 와인 신생지로 각광받는 아르헨티나, 칠레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들은 고른 기후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어느 해에 생산되는 와인이든 고른 맛을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좋은 와인의 뒤에 테루아가 있다면 아름답고 화려한 발레의 기술과 표현 뒤에는 테르가 있다. 앞서 언급한 ‘땅’, 바로 그것이다. 발레는 기본적으로 공기를 가르며 하늘로 향해 추는 춤이다. 발레만큼 ‘날아다닌다’라는 표현이 적확한 춤도 드물다. 공중에서 수행하는 발레의 동작들을 앙 레르(en l'air)라고 부르는데 [관련 칼럼 보기] 같은 동작에서 땅바닥에 할 경우 아 테르(á terre)라고 부른다. ‘아 테르’는 ‘땅에서, 바닥에서’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한쪽 다리로는 지탱하고 서고, 다른 쪽 다리는 들어서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롱 드 장브 앙 레르(rond de jambe en l'air)’라고 부른다면, 이 동작에서 들고 있던 다리를 땅바닥으로 내려서 발끝으로 원을 그리면 ‘롱 드 장브 앙 테르(rond de terre)'라고 부른다. 즉, ‘다리로 공중에서 원을 그리는’ 앙 레르 동작이 ‘땅에서 원을 그리는’ 아 테르 동작이 되는 것이다.
보통 아라베스크(arabesque) 동작은 한 다리로 지탱해서 서고, 다른 다리를 들어 앞이 뒤로 곧게 뻗는 것을 가리키지만 이 동작도 아 테르 상태에서 구사할 수 있다. 들고 있는 다리를 바닥으로 내려놓은 경우 아라베스크 아 테르라고 부른다. 아라베스크 아 테르는 작품 속에서 어떤 장면의 준비 혹은 마무리 자세로 쓰일 수 있다. 발레에서 동작을 시작하기 전 취하는 준비자세를 프레파라시옹(préparation)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프레파라시옹은 아 테르 동작이다. 땅을 제대로 딛고서야 그다음에 공중에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발레 공연을 보면 주역들이 등장해서 솔로 무대를 선보일 때 아 테르 상태에서 호흡과 몸을 가다듬은 후 화려한 기술과 폭발적인 감정들을 보여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돈키호테> 3막 결혼식 장면의 그랑 파드되에서 남녀 두 주인공은 유쾌하고 화사한 에너지와 기술들을 선보이기 전에 뒷모습 상태로 서서 웃음 짓는다. 이제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된 기쁨과 앞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은 아 테르로 숨을 고른 뒤 본격적인 전초전을 하객들에게 선보인다. 사람들은 보통 날아다니는 동작에 취하지만, 그 동작이 나오기 전에 땅을 딛는 과정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와인과 발레는 닮은 구석이 있다. 오랜 시간 숙성해야 하는 점, 그리고 신과 인간의 힘이 만나서 완성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테루아에는 기온과 토양, 지형처럼 신이 부여한 요소도 있지만 포도의 재배와 와인을 만드는 방식 등 인간의 노력하고 연구해서 얻게 된 요소들도 있다. 발레도 체형과 체격조건이나 운동능력 등 타고난 요소와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연습량, 감정의 예술적 표현 같은 인간의 노력이 더해져야 완성된다. 기상이변이 속출하면서 지난해 세계 와인 생산량은 6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들린다. 테루아가 흔들린다는 것은 테르가 흔들리는 것, 기본이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후는 자연이 준 요소이지만 그 기후가 변덕을 부리지 않고 온전히 제 성격대로 움직이려면 그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배려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체형을 타고났더라도 연습과 노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고, 공기 속에 날아다니는 춤사위는 땅을 잘 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달리 기후의 변화가 부쩍 느껴지는 2024년의 여름. 좋은 공연 뒤에 풍미 좋은 와인 한 잔을 마시다가 테루아와 테르의 의미를 돌아본다. 테루아와 테르는 근원이다. 근원이 흔들리는 것은 생명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