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 이어서]

괴곡산장 - 사립문(Intro)

‘I’m like… some kind of… Supernova’

떨어지는 우박 사이로 금속성 형체 하나가 번뜩였다. 그러더니 곧 도깨비불처럼 간데없더라.

“바… 방금 저 허깨비가 뭐라고 했는가. 뭔가 복잡한 2형식 문장을 뇌까린 것 같은데…. 으윽. 갑자기 속이, 속이 울렁거린다. ‘숲에 누워봐’라니, 숲에라도 드러누워 봐야 하는 겐가. 여봐라, 게 어의(御醫) 없느냐.”

전하, 어의는 있는데 어이가 없사옵니다! 그것은 특별한 병환이 아니오라 다름 아닌 영어 울렁증이옵니다. 전하의 나무위키 프로필에 보면, 미국 남가주대(USC) 석사 유학으로 나오는데, 맞사옵니까.

“USC에서 훈민정음을 전공해…”

‘kind of’ 구절이옵니다. 그러고 보니 방금 후드득 털어진 것은 흡사, 카인드 오브… 우주공간에서 날아온 운석 조각처럼 보이는바, 이 신묘한 우박에 대해 관상감(觀象監·조선 시대에 천문 지리를 담당한 기관)에 그 성분에 대한 정밀 분석을 의뢰함이 어떠실지 아뢰옵니다.

“옳거니…! 짐이… 제다이가 될 상인가!”



괴곡산장 3편 - “에스파는 에스퍼맨이 아닌데 왜 2.0이옵니까”


“과인이 요즘 기가 허해진 모양이다. 자꾸 헛것이 보이거나 들리니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어젯밤에도 가리나무에 불이 붙더니 큰 폭발이 일어나는 기묘한 꿈을 꿨으니, 이는 필시 조정에 풍파가 들이닥칠 흉조이니라.”

전하, 그것은 가리나무가 아니라 카리나이옵니다. 폭발한 것은 에스파라는 젊은 놀이패이옵지요.
그룹 에스파의 카리나 / 사진. 에스엠엔터테인먼트
그룹 에스파의 카리나 / 사진.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짐은 N파다. 감성이 강하니, 현실적인 S파와는 결이 안 맞는다.”

전하, (혼잣말로, 내가 S면 넌 나의 N이 되어줘…) 이것은 MBTI가 아니옵니다. 에스파는 ‘æspa’로서 세계관 장인으로 불리는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창립자가 설계한 그룹이옵죠. 본질적으론 4인조이지만 가상의 아바타 멤버인 '아이-에스파 (æ-æspa)'까지 치면 총 8인조이고요. 가상 세계와 리얼월드를 연결하는 존재인 '나이비스(nævis)'까지 올해 3/4분기 데뷔 예정이옵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 어쨌든 요사이에는 ‘쇠맛’ 아이돌로 주가를 올리고 있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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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파 'Supernova' MV]


“어허, 짐은 음양오행 가운데 나무(木)가 강하여 쇠(金)에는 맥을 못 춘다. 흡사 크립토나이트에 노출된 슈퍼맨처럼 이 슈퍼노바를 듣기만 해도 기력이 쇠하는 느낌이로다.”

전하, 걱정 마시옵소서. 쇠는 쇠이되 쇠맛이오라 실제 쇠는 아니옵니다. 다만, ‘Supernova’에는 시각적 요소뿐 아니라 청각적 요소에도 금속성이 지뢰처럼 여기저기 매설돼 있사옵니다. 사실, 에스파 놀이패가 앞서 내놨던 ‘Savage’(2021년 10월)와 ‘Drama’(2023년 11월)에서는 대놓고 철금(metallophone·鐵琴) 소리까지 삽입됐었지요.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음악인 ‘가믈란’에서나 쓸 법한, 평균율에서 살짝 음정이 나간 철금 샘플이 쇠맛을 고막에 제대로 들이댔사옵니다.

“쇠 앞에 맥을 못 추는 과인도 과연 중독될 지경이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이 강력한 쇠맛의 에스파 놀이패를 삼도수군통제영에 배치하여 적들이 감히 우리 해안선을 넘보지 못하게 하라!”

다만, 이번 ‘Supernova’에서는 음계와 화성 진행부터가 다분히 ‘금속적’이옵니다. 보컬 멜로디도, 테마 선율도 으뜸음 ‘미(E)’를 기반으로 한 프리지언(Phrygian) 음계로 구성됐습지요. 프리지언 음계는 중동, 이집트, 스페인의 전통음악에 많이 쓰입니다. 옛 서구 교회음악에서는 불경하다고 하여 짓거나 부르는 것조차 금지됐던 음계이옵니다. 성스럽지 않은 이단의 느낌이라는 거지요. 3온음(tritone), 즉 일명 악마의 음정이라 불리는 증4도(이를테면 ‘도’와 ‘파#’ 사이)가 그랬듯 말입니다.

종교적 배경을 떠나서 뭔가 듣다 보면 비장하면서도 결기가 느껴지는, 묘하게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는 음계임에는 틀림이 없사옵니다. 실제로 블랙 새버스부터 메탈리카까지 수많은 헤비메탈(heavy metal·중금속) 밴드들이 이런 음계의 멜로디를 악곡에 즐겨 썼습죠.
메탈리카 / 출처. 한경DB
메탈리카 / 출처. 한경DB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과인도 *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에서 듣고 반한 그 노래 아닌가. 유학은 아메리카로 갔지만 금속은 메탈리카에게서 배워왔느니라!”

정확히 들으셨사옵니다. 그 노래도 프리지언 음계를 주로 사용한 곡이옵지요. 하지만 'Supernova'를 슈퍼-곡으로 만든 또 하나의 숨은 매력 포인트는 박자에서도 찾을 수 있사옵니다. 그 핵심이 바로 '16분음표 엇박' 아닐까 하옵니다.

‘No-va’ ‘Can’t-stop’ ‘hy-per’ ‘stel-lar’ ‘원-초’ ‘그-걸’ ‘찾-아’ ‘봐-봐’
후렴구를 구성하는 키워드 음절들은 모두 소인이 하이픈(-)으로 표시한 정박을 사이에 두고 16분음표 엇박에 배치됐습지요.

[♪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Live)]


“산장지기의 말이 옳다. 그래서 불러도 불러도, 들어도 들어도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중독성이 나오는 것이로다!”

그렇사옵니다. 또한 버스(verse)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베이스 리프(riff)도 걸작이옵지요. 구체적인 음계로 구성하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부우웅~’ 하며 글리산도(glissando)로 무한의 미분음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구조이지요. 여기서도 ‘미’와 ‘파’ 등 마디의 처음을 찍어주는 첫 음이 정박이 아니라 16분음표 밀려서 나오는 것이 포인트이옵니다.

“그런데 슈퍼노바는 초신성이라는 뜻이렷다. 왜 뜬금없이 천체물리학이 주제로 등장하였는고. 대중가요 가사는 사랑 타령처럼 조금은 '뻔한 수작'이나 ‘완전 쉬운 공식’(feat. 'How Sweet' by 뉴진스)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대형 걸그룹이 히트를 노리며 내는 노래라면 더더욱 그러하고.”
그룹 에스파 / 출처. 한경DB
그룹 에스파 / 출처. 한경DB
그러고 보니 양자역학과 물리학 개념을 대거 도입했던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신세계'(2015년) 이후로 이렇게 과학에 진심인 곡이 있었나 싶사옵니다. 물론 2022년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 있었지만 결국엔 사랑 노래, 이별 노래였지요.

초신성은 보통 신성보다 1만 배 이상의 빛을 내는 천체로서, 질량이 큰 별이 진화하는 마지막 단계이옵니다. 급격한 폭발로 엄청나게 밝아진 뒤 점차 사라지옵지요(feat. 표준국어대사전). 이름은 신성(新星)이지만 신생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에 가까운 아이러니컬한 존재이옵니다. 에스파는 'Supernova'를 통해 에스파 1.0을 죽이고 에스파 2.0으로 더 찬란하게 태어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에스파는 그간 곡절이 많았지요.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와 에스파를 둘러싸고 근년에 여러 네거티브 이슈들이 많았지요. 이수만 창립자의 퇴장, 카카오-하이브 인수전, 카리나 열애 이슈 등….

'재미 좀 볼/빛의 Core'가 등장하고 '문이 열'리며 '날 닮은 너 너 누구야'라고 놀랄 만한 새로운 거울 자아와 조우하는 것이 'Supernova'의 서막이라면, '원초'를 새롭게 찾고 (어떤 다른 창조주가 만들지 않은 나만의) '내 우주'를 불러낸다는 것은 에스파 세계관의 창조자인 이수만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드라마를 써내겠다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Supernova'가 수록된 에스파 정규 1집 앨범 'Armageddon' 이미지 / 출처. 한경DB
'Supernova'가 수록된 에스파 정규 1집 앨범 'Armageddon' 이미지 / 출처. 한경DB
“음악도, 가사도, 메시지도 가요 차트 1위곡으론 이례적이다. 사랑도, 우정도, 이별도, 향수도 아닌 뜬구름 잡는 초신성 이야기에 금속성의 음악까지...”

이것은 가히 미국에서 메탈리카의 'Metallica'가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찍고 수록곡인 'Enter Sandman'이 싱글차트 16위까지 치고 올라간 것에 비견할 만하옵니다. 침대 밑에서, 옷장 속에서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괴기스러운 노래가 상업적 성공을 거둔 그 시절은 세기말을 앞둔 1991년이었습죠.

한편, '우린 어디서 왔나', '사건은 다가와', '질문은 계속돼'는 에스파 세계의 빅뱅을 탐구하는 새로운 탐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물론 'Ah Oh Ay'까지 붙은 저, 어떤 음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로봇처럼 표정 없는 미분음 랩은 AI의 안내 멘트 또는 선언문처럼 차갑고 시린 금속성의 느낌을 5배, 50배로 증폭시키는, 이 곡의 숨은 킬링 포인트라 아니 할 수 없사옵니다.
그룹 에스파 / 사진. 에스엠엔터테인먼트
그룹 에스파 / 사진.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좀처럼 지겨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더 좋아지는 노래다. 결국 올해 가요계는 '밤양갱'과 'Supernova'의 대결로 정리되는 것 아니겠는가. 짐은 어디서 왔나 Oh Ay! 가마는 다가와 Ah Oh Ay!”

▶▶▶[관련 칼럼] “밤양갱은 팥양갱이 아닌데 왜 팝양갱이 되었사옵니까”

(우르릉, 콰콰쾅! 그때 산장이 일순 암흑으로 덮이더니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풀벌레와 시냇물 소리의 앰비언스에 익숙했던 관종과 산장지기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더라.)
에스파는 세일러문이 아닌데 왜 쇠일러문이옵니까
[다음 편에 계속]

임희윤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