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백송 터엔 '원조 닭살 커플'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흐르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한이수의 서촌기행
통의동 백송 터(2)
통의동 백송 터(2)
통의동 백송 터에는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화순옹주와 그의 남편 월성위 김한신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1720년 동갑내기에 죽은 날도 또 같다. 화순옹주는 영조가 왕자 시절 얻은,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화순옹주는 태어날 때 장애가 있었고, 어머니 정빈 이씨는 옹주가 태어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슬픔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 엄마가 낳은 효장세자를 비롯한 동복형제들도 모두 이곳에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릴 적 엄마와 형제들을 잃어 늘 외롭게 커온 화순옹주에게 영조는 키 크고 잘생긴,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을 짝지어주었다. 이들에게 자녀는 없었다. 부마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과거 응시를 금지시켜 출사를 못 하게 했다. 대신 먹고 살 만큼 넓은 땅을 주었다. 영조도 이들에게 추사 고택으로 알려진 예산의 넓은 땅과 집을 주고 '월성위'로 봉했다. '월성'은 경주의 옛 이름이고, 위는 부마에게 주는 벼슬이다.
이들은 장안에 소문날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 닭살 커플의 원조이다. 보통 닭살 커플로 알려진 부부들은 가끔 텔레비전에서 사이좋게 보이지만, 얼마 뒤에 이혼을 발표하기도 한다. 속칭 쇼윈도 부부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영조도 이들을 어여삐 보았다. 측은한 딸 화순옹주를 사랑한 김한신이 더없이 미더웠고 남편과 잘 살아가는 딸이 고마웠다. 영조는 자신이 왕자 시절, 화순옹주에게는 고향 같은 이곳의 땅을 딸에게 주었다. 사실 이곳은 영조의 꿈과 슬픔이 서린 곳이다. 영조는 부왕 숙종에게 이곳을 하사받아 왕이 되기 전, 9년을 여기에서 살았다. 꿈을 키워 끝내 왕이 되었지만 슬픈 일도 많이 경험했다. 아내 정빈 이씨와 그의 소생을 잃었고, 이곳에서 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 장희빈에게 그토록 괴롭힘을 당한 어머니, 숙빈 최씨는 늘 그의 마음에 한으로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형 (경종)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자신을 지지하던 무수한 신하들이 죽어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아야 했다.
과거는 아름답게 기억되는가. 영조는 왕이 된 뒤에도 이곳에 100번 이상 거둥했다. 그는 사분오열로 나누어진 당파를 수습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곳에서의 꿈과 좌절 경험이 그를 더 강인하게 했을 것이다. 통의동 백송 터는 창의문 근처에 있는 궁이라 하여 '창의궁'이라 불렀고, 창의궁의 일부는 월성위 김한신이 살던 곳이라 하여 '월성위궁'이라 했다.
이곳을 딸 화순옹주에게 주었다. 그의 딸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살아가던 이들 부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김한신이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39세, 창창한 나이였다. 가장 큰 스트레스가 배우자의 사망이라는데 화순옹주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자녀도 없이 오직 남편만 믿고 살았는데... 화순옹주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녀는 남편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한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행에 옮겨 곡기를 끊었다.
딸 바보 영조는 큰일 날까 싶어 금식 7일째 되는 날 '음식을 권하지 않고 좌시하면 어찌 아비 된 도리라 하겠는가?' 하며 미음 먹기를 권했다. 한 술 두 술 뜬 옹주는 '차마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며 먹은 음식을 다 토해냈다. 슬픔이 사무쳐 몸에서 음식이 받지 않는 것이다. 결국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은 지 1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상심은 너무도 컸다. 영조는 이곳에 사당을 설치하고 곡했다. '나의 정성이 부족해 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지만, 정절을 지킨 네가 아름답구나'하며 애끓는 마음을 전했다. 신하들은 지아비의 죽음을 자결로써 따른 정절의 화신, 화순옹주를 기리기 위해 정려문을 세우고자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이 거절했다. 남편의 죽음을 따라간 열녀로 추앙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불효자 아닌가? 신하들의 청을 물렸다. 정조대에 와서야 예산집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곳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라고 알려졌다. 왜냐하면 김한신의 증손자가 우리가 잘 아는 추사 김정희이다. 김한신의 양아들이 김이주, 김이주의 아들이 김노영, 김노영의 양아들이 추사 김정희이다. 김정희의 친동생 김상희의 5대손인 김익환옹은 완당 (김정희의 호)의 서울 고택 월성위궁 위치를 통의동 백송이 있는 곳이라고 지목했다. 그러나 최근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월성위궁은 적선방 (적선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1903년 한국 <경성 전도>에는 경복궁 서십자각 모서리에 '월궁후동' (옛 월성위궁)이란 지명이 적혀 있고, 1914년 <경성부시가경계도>에 같은 위치에 '월궁동'이란 지명이 적혀 있어서 영조가 살았던 창의궁과 월성위궁이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마도 김익환옹이 이곳을 지목한 것은 예산의 추사고택 (김한신 고택)에 있는 백송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창의궁의 일부를 떼어주었으니, 현재의 백송 터가 창의궁인 것은 맞지만 그 땅 일부에 월성위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는 백송 말고는 아무런 흔적이 없을까?
일제 강점기가 되자 창의궁은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다. 그 이후로 이곳에 동양척식 직원을 위한 사택이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남아있던 궁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왕이 사는 궁궐도 모두 훼손되는 시대에 왕의 잠저야 오죽했겠는가. 해방 뒤에는 민간에 팔려 100개 이상의 필지로 쪼개졌다. 그런데 지금도 이곳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이 남아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한자로 '척식 (拓殖)'은 '개척'할 때 척이고 심을 식자를 쓴다. 이름에 아무런 은유가 없다. 식민지를 개척해서 자국민들을 심어 놓겠다는 것이다. 이름 그대로 이 회사는 나라를 강점한 뒤, 실효적 지배를 위해 일본 국민들을 많이 이주시켰다. '동척'은 나라에 황실 소유의, 주인 없는 땅들과 국유지 등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 국민들을 이주시켰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남산 아래 남촌에만 살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은 끊임없이 북촌, 조선의 중심부에 거점을 마련하려고 했다.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1926년 이전에 이미 이곳에 동척의 사택이 들어서 있었다. 현재 경복궁의 동쪽 송현동 넓은 땅에도 우리나라를 산업으로 수탈해 간 식산은행 (한국산업은행 전신, 현재 롯데호텔 자리)의 사택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조선총독부 좌측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오른쪽에는 식산은행이 있어 북촌 노른자 땅을 점차 차지해 갔다. 지금 하나은행 본점 옆 을지로입구역에 가면 나석주 열사 동상이 서 있다. 나석주는 1926년 일제의 경제적 수탈의 두 기관인 식산은행 (롯데호텔 자리)에 수류탄을 던지고 가로질러 동양척식주식회사 (하나은행 본점 자리)로 쇄도하여 수류탄과 총기를 난사했다. 을지로 입구에서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순국한 분이다. 나석주 열사가 그렇게 한 이유는 두 기관이 우리나라의 영토와 산업을 유린한 식민지 수탈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꿈과 좌절이 서린 창의궁, 거기에 살았던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이곳에서 아름다운 글씨를 남긴 김정희의 흔적, 그 터 위에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 쓰러진 백송. 지금도 남아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 사택 건물에 꾸민 음식점. 역사는 말도 없이 자꾸자꾸 흘러 흘러만 간다.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백송도 후계목에 의해 대체된 지 30년이 흘렀다.
한이수 칼럼니스트
이들은 장안에 소문날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 닭살 커플의 원조이다. 보통 닭살 커플로 알려진 부부들은 가끔 텔레비전에서 사이좋게 보이지만, 얼마 뒤에 이혼을 발표하기도 한다. 속칭 쇼윈도 부부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영조도 이들을 어여삐 보았다. 측은한 딸 화순옹주를 사랑한 김한신이 더없이 미더웠고 남편과 잘 살아가는 딸이 고마웠다. 영조는 자신이 왕자 시절, 화순옹주에게는 고향 같은 이곳의 땅을 딸에게 주었다. 사실 이곳은 영조의 꿈과 슬픔이 서린 곳이다. 영조는 부왕 숙종에게 이곳을 하사받아 왕이 되기 전, 9년을 여기에서 살았다. 꿈을 키워 끝내 왕이 되었지만 슬픈 일도 많이 경험했다. 아내 정빈 이씨와 그의 소생을 잃었고, 이곳에서 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 장희빈에게 그토록 괴롭힘을 당한 어머니, 숙빈 최씨는 늘 그의 마음에 한으로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형 (경종)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자신을 지지하던 무수한 신하들이 죽어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아야 했다.
과거는 아름답게 기억되는가. 영조는 왕이 된 뒤에도 이곳에 100번 이상 거둥했다. 그는 사분오열로 나누어진 당파를 수습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곳에서의 꿈과 좌절 경험이 그를 더 강인하게 했을 것이다. 통의동 백송 터는 창의문 근처에 있는 궁이라 하여 '창의궁'이라 불렀고, 창의궁의 일부는 월성위 김한신이 살던 곳이라 하여 '월성위궁'이라 했다.
이곳을 딸 화순옹주에게 주었다. 그의 딸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살아가던 이들 부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김한신이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39세, 창창한 나이였다. 가장 큰 스트레스가 배우자의 사망이라는데 화순옹주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자녀도 없이 오직 남편만 믿고 살았는데... 화순옹주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녀는 남편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한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행에 옮겨 곡기를 끊었다.
딸 바보 영조는 큰일 날까 싶어 금식 7일째 되는 날 '음식을 권하지 않고 좌시하면 어찌 아비 된 도리라 하겠는가?' 하며 미음 먹기를 권했다. 한 술 두 술 뜬 옹주는 '차마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며 먹은 음식을 다 토해냈다. 슬픔이 사무쳐 몸에서 음식이 받지 않는 것이다. 결국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은 지 1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상심은 너무도 컸다. 영조는 이곳에 사당을 설치하고 곡했다. '나의 정성이 부족해 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지만, 정절을 지킨 네가 아름답구나'하며 애끓는 마음을 전했다. 신하들은 지아비의 죽음을 자결로써 따른 정절의 화신, 화순옹주를 기리기 위해 정려문을 세우고자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이 거절했다. 남편의 죽음을 따라간 열녀로 추앙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불효자 아닌가? 신하들의 청을 물렸다. 정조대에 와서야 예산집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곳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라고 알려졌다. 왜냐하면 김한신의 증손자가 우리가 잘 아는 추사 김정희이다. 김한신의 양아들이 김이주, 김이주의 아들이 김노영, 김노영의 양아들이 추사 김정희이다. 김정희의 친동생 김상희의 5대손인 김익환옹은 완당 (김정희의 호)의 서울 고택 월성위궁 위치를 통의동 백송이 있는 곳이라고 지목했다. 그러나 최근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월성위궁은 적선방 (적선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1903년 한국 <경성 전도>에는 경복궁 서십자각 모서리에 '월궁후동' (옛 월성위궁)이란 지명이 적혀 있고, 1914년 <경성부시가경계도>에 같은 위치에 '월궁동'이란 지명이 적혀 있어서 영조가 살았던 창의궁과 월성위궁이 완전히 겹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마도 김익환옹이 이곳을 지목한 것은 예산의 추사고택 (김한신 고택)에 있는 백송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창의궁의 일부를 떼어주었으니, 현재의 백송 터가 창의궁인 것은 맞지만 그 땅 일부에 월성위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는 백송 말고는 아무런 흔적이 없을까?
일제 강점기가 되자 창의궁은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다. 그 이후로 이곳에 동양척식 직원을 위한 사택이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남아있던 궁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왕이 사는 궁궐도 모두 훼손되는 시대에 왕의 잠저야 오죽했겠는가. 해방 뒤에는 민간에 팔려 100개 이상의 필지로 쪼개졌다. 그런데 지금도 이곳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이 남아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한자로 '척식 (拓殖)'은 '개척'할 때 척이고 심을 식자를 쓴다. 이름에 아무런 은유가 없다. 식민지를 개척해서 자국민들을 심어 놓겠다는 것이다. 이름 그대로 이 회사는 나라를 강점한 뒤, 실효적 지배를 위해 일본 국민들을 많이 이주시켰다. '동척'은 나라에 황실 소유의, 주인 없는 땅들과 국유지 등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 국민들을 이주시켰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남산 아래 남촌에만 살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은 끊임없이 북촌, 조선의 중심부에 거점을 마련하려고 했다.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1926년 이전에 이미 이곳에 동척의 사택이 들어서 있었다. 현재 경복궁의 동쪽 송현동 넓은 땅에도 우리나라를 산업으로 수탈해 간 식산은행 (한국산업은행 전신, 현재 롯데호텔 자리)의 사택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조선총독부 좌측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오른쪽에는 식산은행이 있어 북촌 노른자 땅을 점차 차지해 갔다. 지금 하나은행 본점 옆 을지로입구역에 가면 나석주 열사 동상이 서 있다. 나석주는 1926년 일제의 경제적 수탈의 두 기관인 식산은행 (롯데호텔 자리)에 수류탄을 던지고 가로질러 동양척식주식회사 (하나은행 본점 자리)로 쇄도하여 수류탄과 총기를 난사했다. 을지로 입구에서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순국한 분이다. 나석주 열사가 그렇게 한 이유는 두 기관이 우리나라의 영토와 산업을 유린한 식민지 수탈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꿈과 좌절이 서린 창의궁, 거기에 살았던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이곳에서 아름다운 글씨를 남긴 김정희의 흔적, 그 터 위에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 쓰러진 백송. 지금도 남아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 사택 건물에 꾸민 음식점. 역사는 말도 없이 자꾸자꾸 흘러 흘러만 간다.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백송도 후계목에 의해 대체된 지 30년이 흘렀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