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현판석은 이완용이 아니라 명필 김가진이 썼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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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가진 서예전 ‘백운서경(白雲書境)’
혼탁한 시대 속에서 지켜낸 고결한 글씨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9월 19일까지
당대 최고 명필…항일투쟁 나섰던 정신, 글씨에 고스란히
유홍준 교수 등 전문가 도슨트 강연도
혼탁한 시대 속에서 지켜낸 고결한 글씨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9월 19일까지
당대 최고 명필…항일투쟁 나섰던 정신, 글씨에 고스란히
유홍준 교수 등 전문가 도슨트 강연도
‘글로 말하는 예술’ 서예(書藝)는 오랜 세월 동양미학의 정수로 불려 왔다. 붓에 인격을 담을 때, 비로소 글씨가 예술이 된다는 믿음으로 서예가들은 붓을 제대로 잡는 기술만큼이나 올바른 마음을 닦는 데 공을 들였다. 글씨를 잘 쓴다고 모두가 명필은 아니란 뜻이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던 개화기를 지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획을 그었던 대가의 글씨가 세상에 나왔다.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이 남긴 200여 점의 서예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가 ‘백운서경(白雲書境)’이라는 제목으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렸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기획하고 직접 전시 해설까지 맡은 전시다. 김가진은 구한말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당대엔 최고 서예가로 이름 높았다. 창덕궁 비원에 걸린 현판 대부분이 김가진의 글씨로 쓰였을 정도다. 김가진은 이른 나이에 서법에 심취한 이후 송나라 미불, 명나라 동기창, 조선 후기 이광사의 서풍을 토대로 50대 후반 들어 자신만의 서체인 ‘동농체’를 완성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유홍준 교수는 “김가진은 서예 세계를 구축해 나감에 있어 추사 김정희가 강조했던 고전에 깊이 들어가 새로운 걸 만드는 ‘입고출신(入高出新)’을 견지했다”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취향을 좇기 보단 오랜 기간 고법의 정수를 체득하는 데 천착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당시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정통적인 서풍의 행서를 보여줬다는 점이 서예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진해 좌천 길에 오르고, 국권이 피탈되자 대한제국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74세 노구에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는 등 부끄럼 없는 인간으로 살고자 노력했던 정신이 글씨에 고스란히 나타나기 때문. 비슷한 서풍을 보여줬지만, 삶의 궤적이 올곧지 못했던 이완용보다 김가진이 서예가로서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게 유 교수의 설명이다. 전시에는 김가진이 남긴 시축(詩軸·시를 적은 두루마리)과 편지, 병풍을 비롯해 궁궐과 전국 사찰, 양반가에 걸린 현판과 암각글씨 탁본 등 그의 서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대거 걸렸다. 김가진은 웅장한 크기의 대자서(大字書)도 여럿 남겼는데, 전시에선 자신이 살던 인왕산 계곡 터에 새긴 거대한 ‘백운동천(白雲洞天)’ 탁본이 눈에 띈다. ‘백운동에 세운 별천지’라는 뜻으로 서울 청운동 자하문터널 위쪽 골짜기 바위에 새겨진 글씨로, 강한 골격에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황해도 관찰사로 일할 때 개성 박연폭포 암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탁본도 흥미롭다. 글자 하나의 크기가 가로 1.2m, 세로 1m에 달하는데, 유홍준 교수는 “기술이 아닌 참선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나라를 걱정하고 서예로 자기수양을 하면서도 가족을 사랑했던 김가진의 면모도 볼 수 있다. 아들의 첫돌을 기념해 써준 천자문과 교육을 위해 직접 쓴 한글 교재가 대표적이다. 이 중 한글 글씨체는 서울 현저동에 쓰인 독립문 현판석에 새겨진 글씨와 유사한 만큼 눈여겨 볼 만하다. 지금까지 이완용으로 알려졌던 독립문을 쓴 주인공이 김가진임을 뒷받침하기 때문. 실제로 서예계와 역사학계에선 독립문을 쓴 사람이 당시 독립협회 활동을 같이한 김가진과 이완용 중 하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유 교수는 “붓글씨를 쓰게 되면 마제잠두(馬蹄蠶頭)라 해서 획을 그을 때 말굽과 누에머리 모양으로 쓰는데 동농의 글씨는 그런 게 없다”며 “독립문의 글씨체가 이와 비슷한데 필법 등으로 보면 김기진이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19일까지다. 전시 기간 매주 화요일 오후 3시부터 유 교수와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 김채식 경훈초당 대표 등 전문가들이 도슨트 형식으로 현장 강연을 진행한다.
유승목 기자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던 개화기를 지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획을 그었던 대가의 글씨가 세상에 나왔다.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이 남긴 200여 점의 서예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가 ‘백운서경(白雲書境)’이라는 제목으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렸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기획하고 직접 전시 해설까지 맡은 전시다. 김가진은 구한말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당대엔 최고 서예가로 이름 높았다. 창덕궁 비원에 걸린 현판 대부분이 김가진의 글씨로 쓰였을 정도다. 김가진은 이른 나이에 서법에 심취한 이후 송나라 미불, 명나라 동기창, 조선 후기 이광사의 서풍을 토대로 50대 후반 들어 자신만의 서체인 ‘동농체’를 완성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유홍준 교수는 “김가진은 서예 세계를 구축해 나감에 있어 추사 김정희가 강조했던 고전에 깊이 들어가 새로운 걸 만드는 ‘입고출신(入高出新)’을 견지했다”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취향을 좇기 보단 오랜 기간 고법의 정수를 체득하는 데 천착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당시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정통적인 서풍의 행서를 보여줬다는 점이 서예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진해 좌천 길에 오르고, 국권이 피탈되자 대한제국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74세 노구에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는 등 부끄럼 없는 인간으로 살고자 노력했던 정신이 글씨에 고스란히 나타나기 때문. 비슷한 서풍을 보여줬지만, 삶의 궤적이 올곧지 못했던 이완용보다 김가진이 서예가로서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게 유 교수의 설명이다. 전시에는 김가진이 남긴 시축(詩軸·시를 적은 두루마리)과 편지, 병풍을 비롯해 궁궐과 전국 사찰, 양반가에 걸린 현판과 암각글씨 탁본 등 그의 서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대거 걸렸다. 김가진은 웅장한 크기의 대자서(大字書)도 여럿 남겼는데, 전시에선 자신이 살던 인왕산 계곡 터에 새긴 거대한 ‘백운동천(白雲洞天)’ 탁본이 눈에 띈다. ‘백운동에 세운 별천지’라는 뜻으로 서울 청운동 자하문터널 위쪽 골짜기 바위에 새겨진 글씨로, 강한 골격에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황해도 관찰사로 일할 때 개성 박연폭포 암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탁본도 흥미롭다. 글자 하나의 크기가 가로 1.2m, 세로 1m에 달하는데, 유홍준 교수는 “기술이 아닌 참선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나라를 걱정하고 서예로 자기수양을 하면서도 가족을 사랑했던 김가진의 면모도 볼 수 있다. 아들의 첫돌을 기념해 써준 천자문과 교육을 위해 직접 쓴 한글 교재가 대표적이다. 이 중 한글 글씨체는 서울 현저동에 쓰인 독립문 현판석에 새겨진 글씨와 유사한 만큼 눈여겨 볼 만하다. 지금까지 이완용으로 알려졌던 독립문을 쓴 주인공이 김가진임을 뒷받침하기 때문. 실제로 서예계와 역사학계에선 독립문을 쓴 사람이 당시 독립협회 활동을 같이한 김가진과 이완용 중 하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유 교수는 “붓글씨를 쓰게 되면 마제잠두(馬蹄蠶頭)라 해서 획을 그을 때 말굽과 누에머리 모양으로 쓰는데 동농의 글씨는 그런 게 없다”며 “독립문의 글씨체가 이와 비슷한데 필법 등으로 보면 김기진이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19일까지다. 전시 기간 매주 화요일 오후 3시부터 유 교수와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 김채식 경훈초당 대표 등 전문가들이 도슨트 형식으로 현장 강연을 진행한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