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파리올림픽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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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외다. 방학이 짧아서 방학 숙제가 없다며 좋아했다. 더구나 아이는 12일을 알차게 보냈다. 저녁을 먹고 학원 숙제를 마치면 아빠인 이병일 시인과 함께 탁구를 치러 갔단다. 이병일 시인은 가까이 사는 문동만 시인 덕분에 탁구에 빠지게 되었다.
문동만 시인은 시인 중에 탁구 잘 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게다가 작년 이육사 문학상까지 받는 바람에 “탁구 잘 치는 사람이 시도 잘 쓴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남편이 탁구 라켓을 사주며 아들을 탁구의 길로 인도한 것이다. 탁구를 잘 치면 시험도 잘 친다나 뭐라나.
어쨌든 우리 집 탁구 열기에 맞춰 파리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탁구 얘기를 해봐라. 나의 관심은 양궁이다. 나는 ‘활과 무사’라는 시에서 활 쏘는 자세에 대해 “겨누고 있는 찰나가 둥근 과녁을 펼쳐낸다”고 썼다. 한국 여자양궁이 10연패를 이루었다. 10연패라니, 경기 룰이 수없이 바뀌었던 36년 동안 한 번도 금메달을 놓친 적이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한국 양궁 선수들은 소음에 적응하기 위해 야구장에서, 바람을 뚫기 위해 바닷가 근처에서, 하늘의 무심함에 놀라지 않기 위해 폭우가 쏟아지는 운동장에서 수없이 활을 쏘았으리라. 선수들을 응원하는 동안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그럴수록 드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고요할까?’ 선수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단 한 발의 명중을 위해 호흡마저 멈추는 그 순간, 시위를 당기는 팔은 활 그 자체였다. 온몸이 활이 된 것 같았다. 오조준하면서도 중앙에 맞히는 저 활을 감각이라고 해두자. 실패란 감각을 넘어서는 동물적인 감각.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서 나도 유년 시절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풀숲에 앉아 수박을 먹고 있는 사진이다. 여동생과 나는 아빠가 낫으로 잘라준 수박을 먹었다. 얼굴보다 큰 수박 조각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입과 목에 수박 물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먹었다. 정말 행복했다.
작은 것, 그렇게 작은 것이 마음에 들어차는 느낌이 나는 좋다. 사람도 작게 태어나서 커진다. 몸도 커지고 마음도 커진다. 단어 하나가 한 문장이 되고 한 편의 글이 되듯 매일 조금씩 쓴 글이 사람을 키운다.
양궁 선수가 사람들의 환호성과 바람과 땡볕과 더위 같은 외부의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 안에 놓인 과녁을 향해 고요히 활을 겨누듯 내가 만난 사람들이 그 누구의 관섭도 받지 않고 자기 안의 비밀을 풀어내길 바랐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는 첫 올림픽, 첫 경기에 진 선수들을 응원하고 싶다. 그렇게 커가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다. 나의 휴가는 올림픽 경기를 보는 일이다. 경기를 보다 보면 나의 감각이 깨어날지도 모른다. 사실 다른 얘기를 쓰려고 했는데 올림픽 보느라 글이 안 써져서 올림픽 얘길 썼다. 나의 글쓰기는 나의 올림픽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