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 수출·파독 광부…한국 경제 '기적의 순간들'로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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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리가 전시장으로…
대한민국 희망과 함께 달립니다
美원조로 한끼 겨우 먹던 빈국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서기까지
위기 때마다 온국민 똘똘 뭉쳐
굴곡의 시간 이겨낸 한국 경제
서울 버스 200대에 싣고 달려
대한민국 희망과 함께 달립니다
美원조로 한끼 겨우 먹던 빈국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서기까지
위기 때마다 온국민 똘똘 뭉쳐
굴곡의 시간 이겨낸 한국 경제
서울 버스 200대에 싣고 달려
배급 빵 아껴 먹던 시절서 日 수출 넘어서기까지….
서울 도로 곳곳이 이달부터 대한민국 경제 발전사와 만나는 전시장으로 변신한다. 한국경제신문은 올해 창간 60주년을 맞아 세계 최초로 버스를 활용한 이동 사진전을 연다. 서울 버스 200대가 1일부터 우리 경제의 ‘희망과 기적의 순간들’을 담은 사진을 부착하고 서울 구석구석을 누빌 예정이다.
전시 사진은 압축 성장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주요 장면 20개로 구성했다.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대국 일본을 넘어서는 수출 강국으로 성장하기까지 60년 기록을 생생하게 담았다.
한국 경제 60년은 그야말로 기적의 역사였다. 1960년대만 해도 국민들은 하루 끼니를 걱정했다. 농촌에선 봄이면 쌀독이 바닥나 보리가 여물 때까지 ‘보릿고개’를 견뎌야 했다. 당시 정부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옥수수빵을 나눠줬다. 결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이었다. 배고픔을 달랠 소중한 한 끼였지만 집에 있는 동생 걱정에 차마 베어 물지 못하는 아이가 많았다.
한국경제신문이 처음 신문을 발행한 1964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07달러로 필리핀의 절반 수준이었다. 작년 GNI 3만3745달러와 비교하면 300분의 1 수준이다. 청계천의 옛 모습은 당시의 비참한 삶을 드러낸다. 지금은 화려한 빌딩 숲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도심 속 쉼터로 변했지만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악취가 진동하는 도시 빈민의 판자촌이었다.
정부는 극심한 실업과 외화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동력 수출을 추진했다. 1966년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간호사의 표정은 가난한 나라 아들딸의 서글픈 시대상을 담고 있다. 시꺼먼 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낯선 독일의 깊은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의 웃음에도 희망과 기적의 감동이 묻어난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준공은 고도성장의 출발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준공 직후 텅 빈 고속도로 위에 술을 뿌리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사진은 한 국민으로서 ‘잘사는 나라’를 향한 염원을 드러낸다. 갓을 쓰고 호남고속도로 기공식에 나온 완주군민의 축하 행렬은 ‘조국 근대화’란 구호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정부는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 육성(산업 합리화) 정책을 추진했다. 자주국방을 위한 국산병기 개발 등을 목적으로 본격화한 중화학공업화는 이후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3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에서 쏟아져나온 쇳물은 한국의 ‘산업 철기시대’를 여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당시 1고로 앞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던 박태준 당시 사장과 포스코 직원들의 모습은 한국 경제사에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산업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서울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등굣길 만원 버스는 버스 차장(안내양)이 열린 문에 매달린 채 손으로 ‘탕탕’ 버스를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쳐야 출발했다. 버스 기사가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홱 돌려 승객들이 안쪽으로 밀려들면 그제야 버스 차장이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고질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흑자로 돌린 첫 계기는 1970년대 말 중동 건설 붐이었다. 우리 근로자들이 사막에서 거센 모래바람을 뚫고 벌어들인 외화는 우리도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제조업 수출도 이즈음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는 1975년 ‘포니’ 생산을 시작으로 세계 자동차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삼성전자는 1984년 64K D램을 자체 개발하고 처음 수출에 뛰어들었다. 당시 경기 용인시 기흥 사업장에서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수출 성공 기원 고사를 지내는 직원들의 모습은 반도체 수출 신화의 서막이었다.
한국 경제는 이후에도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등으로 큰 부침을 겪었지만 2000년대 들어 안정적인 흑자 기조에 들어섰다. 그동안 월별 기준 수출액으로 여러 차례 일본을 앞선 데 이어 올해는 연간으로 사상 첫 추월을 바라보고 있다.
전 국민 나무 심기 운동은 온통 민둥산이던 국토를 푸르게 바꾸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폐유조선을 물막이로 동원한 충남 서산 간척지 개발은 땅 한 평이라도 더 늘리려는 국토 개발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기막힌 사례였다. 1997년 외환위기 땐 온 국민이 장롱 속 금붙이를 모아 팔았다. 5000만 명이 하나 된 함성으로 4강 신화의 감격을 만끽한 2002년 한·일 월드컵 길거리 응원전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감동과 기적의 60년을 거쳐 경제강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은 이제 문화와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전 세계 팬을 사로잡은 K컬처, 누리호 발사와 함께 우리 손으로 열기 시작한 우주시대는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60년 신화의 예고편일지도 모른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서울 도로 곳곳이 이달부터 대한민국 경제 발전사와 만나는 전시장으로 변신한다. 한국경제신문은 올해 창간 60주년을 맞아 세계 최초로 버스를 활용한 이동 사진전을 연다. 서울 버스 200대가 1일부터 우리 경제의 ‘희망과 기적의 순간들’을 담은 사진을 부착하고 서울 구석구석을 누빌 예정이다.
전시 사진은 압축 성장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주요 장면 20개로 구성했다.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대국 일본을 넘어서는 수출 강국으로 성장하기까지 60년 기록을 생생하게 담았다.
○배급 빵으로 배고픔 달랜 점심시간
“옥수수빵 남겨서 동생 갖다줄래요.”한국 경제 60년은 그야말로 기적의 역사였다. 1960년대만 해도 국민들은 하루 끼니를 걱정했다. 농촌에선 봄이면 쌀독이 바닥나 보리가 여물 때까지 ‘보릿고개’를 견뎌야 했다. 당시 정부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옥수수빵을 나눠줬다. 결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이었다. 배고픔을 달랠 소중한 한 끼였지만 집에 있는 동생 걱정에 차마 베어 물지 못하는 아이가 많았다.
한국경제신문이 처음 신문을 발행한 1964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07달러로 필리핀의 절반 수준이었다. 작년 GNI 3만3745달러와 비교하면 300분의 1 수준이다. 청계천의 옛 모습은 당시의 비참한 삶을 드러낸다. 지금은 화려한 빌딩 숲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도심 속 쉼터로 변했지만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악취가 진동하는 도시 빈민의 판자촌이었다.
정부는 극심한 실업과 외화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동력 수출을 추진했다. 1966년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간호사의 표정은 가난한 나라 아들딸의 서글픈 시대상을 담고 있다. 시꺼먼 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낯선 독일의 깊은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의 웃음에도 희망과 기적의 감동이 묻어난다.
○‘한강의 기적’ 밑거름된 고속도로
‘이 도로가 없었다면….’1970년 경부고속도로 준공은 고도성장의 출발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준공 직후 텅 빈 고속도로 위에 술을 뿌리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사진은 한 국민으로서 ‘잘사는 나라’를 향한 염원을 드러낸다. 갓을 쓰고 호남고속도로 기공식에 나온 완주군민의 축하 행렬은 ‘조국 근대화’란 구호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정부는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 육성(산업 합리화) 정책을 추진했다. 자주국방을 위한 국산병기 개발 등을 목적으로 본격화한 중화학공업화는 이후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3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에서 쏟아져나온 쇳물은 한국의 ‘산업 철기시대’를 여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당시 1고로 앞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던 박태준 당시 사장과 포스코 직원들의 모습은 한국 경제사에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산업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서울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등굣길 만원 버스는 버스 차장(안내양)이 열린 문에 매달린 채 손으로 ‘탕탕’ 버스를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쳐야 출발했다. 버스 기사가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홱 돌려 승객들이 안쪽으로 밀려들면 그제야 버스 차장이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가발 수출국에서 반도체·IT 강국으로
1964년까지 한국 수출은 고작 1억달러에도 못 미쳤다. 팔 것이 없어 여성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던 시절이었다.고질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흑자로 돌린 첫 계기는 1970년대 말 중동 건설 붐이었다. 우리 근로자들이 사막에서 거센 모래바람을 뚫고 벌어들인 외화는 우리도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제조업 수출도 이즈음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는 1975년 ‘포니’ 생산을 시작으로 세계 자동차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삼성전자는 1984년 64K D램을 자체 개발하고 처음 수출에 뛰어들었다. 당시 경기 용인시 기흥 사업장에서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수출 성공 기원 고사를 지내는 직원들의 모습은 반도체 수출 신화의 서막이었다.
한국 경제는 이후에도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등으로 큰 부침을 겪었지만 2000년대 들어 안정적인 흑자 기조에 들어섰다. 그동안 월별 기준 수출액으로 여러 차례 일본을 앞선 데 이어 올해는 연간으로 사상 첫 추월을 바라보고 있다.
○금 모으기·나무 심기…감동의 순간도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한 감동의 순간들도 빼놓을 수 없다.전 국민 나무 심기 운동은 온통 민둥산이던 국토를 푸르게 바꾸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폐유조선을 물막이로 동원한 충남 서산 간척지 개발은 땅 한 평이라도 더 늘리려는 국토 개발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기막힌 사례였다. 1997년 외환위기 땐 온 국민이 장롱 속 금붙이를 모아 팔았다. 5000만 명이 하나 된 함성으로 4강 신화의 감격을 만끽한 2002년 한·일 월드컵 길거리 응원전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감동과 기적의 60년을 거쳐 경제강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은 이제 문화와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전 세계 팬을 사로잡은 K컬처, 누리호 발사와 함께 우리 손으로 열기 시작한 우주시대는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60년 신화의 예고편일지도 모른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