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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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면 그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잘하는 방법을 스스로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본의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처럼 만다라트(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표)를 만들어 실천해도 좋고, 노트에 차분히 1년, 3년, 5년, 10년, 30년 목표를 정하고 세부 계획을 세워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게 되는 데 있어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그게 일시적이라면 내 인생에 '크고 중요한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들이 게임하는 것을 두고 걱정합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잘하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여기에는 공부라는 기회비용까지 포함)이 투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테지요. 더구나 '페이커' 이상혁 선수처럼 아시안 게임 금메달에 거액 연봉을 거머쥘 만큼, 게임으로 인생 전체를 승부를 걸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데 있어서 핵심은 오랫동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애널리스트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던 1990년대에 증권회사에 입사해 20년 넘게 애널리스트를 했으니 말입니다. 당시엔 애널리스트도 순환 보직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맡은 업무는 제지 업종 분석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시 저의 제지 업종 리포트를 보고 투자한 분들에게 조금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경제학, 경영학 공부를 마치고 입사 3년 차밖에 안 되는 제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다 해도 제지업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어요? 그나마 체계적인 리포트가 거의 없던 때였고, 시절이 좋아 제가 추천한 기업들의 주가가 대부분 상승했으니 천만다행이었지요.

그런데 연차가 높은 선배들도 사실 지점에서 영업하다 순환 보직으로 투자분석부에 발령받은 분들이 많아서 실력이 다들 고만고만했습니다. 당시 애널리스트들은 특정 업종이나 부문에 특화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라기보다는 이것저것 다하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의 성격이 컸지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맡은 일을 잘하는 방법을 배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회사 내에는 후배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이끌어 줄 선배 애널리스트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한국 주식 시장에 기업 분석과 투자 전략의 개념이 이제 막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시작하던 때였거든요.

제지 기업을 분석하고 5년 차 선배에게 보여 드리며 숙제 검사를 받듯이 리뷰를 부탁드린 적 있습니다. 그 선배는 "내가 제지 업종을 맡아 보지 않아 잘 몰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엔 담당 부장님께 리뷰와 함께 결재를 부탁드렸더니 "굉장한데. 잘 썼어. 이제 대리 승진해도 되겠네"라고 농담하듯이 말했습니다. 이 물건이 제대로 된 것이냐는 제 질문에, 너 물건 잘 팔겠다고 대답하는 꼴입니다.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해졌지요.

그래서 업계의 공부 모임에서 만난 투자신탁사의 부장님께 안면 몰수, 염치 불고하고 리포트를 들고 갔습니다. 그분은 유명한 애널리스트 출신 펀드 매니저였지요. 증권회사 입사 3년 차인 저를 만나줄 이유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투자 신탁 회사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회사의 운용부장이었으니, 슈퍼갑(甲) 운용부장에게 증권사라는 절대을(乙) 신출내기가 겁 없이 찾아간 것이지요. 공부 모임에서 만났다는 인연 하나로 무작정 찾아가서 제가 쓴 리포트의 리뷰를 부탁드렸더니, 읽어 보겠다며 내일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여의도 증권가 전경.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여의도 증권가 전경.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다음날 다시 찾아가 뵈었더니, 웃으시며 "다른 회사 선배에게 리뷰를 부탁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며 "리뷰는 자료에 표시해 두었으니, 앞으로 힘들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돌아와 서류 봉투에서 리포트를 꺼내 드는 순간 저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리포트는 말 그대로 '피바다'였습니다. 빨간 펜으로 오탈자를 바로잡은 것은 물론, 잘못된 문맥과 잘못 계산된 수치, 더 나아가 제지 업종 호황에 대한 논리적 반박 등 차마 제가 부끄러워서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 그래서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하신 거구나. 며칠 밤을 새워 수정한 리포트를 들고 다시 찾아뵈었더니, 그 선배는 "이 정도는 되어야 리포트라고 할 수 있지. 전에 것은 대학생이 쓴 건 줄 알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창피했지요.

그렇게 저의 첫 기업 분석 리포트는 사내 상사나 선배들이 아닌 공부 모임에서 만난 업계 선배의 리뷰를 받고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든 잘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끈질긴 노력과 때로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배워야 합니다. 만약 그분의 리뷰 없이 리포트를 발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리포트는 아마 업계의 웃음거리가 됐을 것이고, 저의 애널리스트 커리어는 시작부터 잘못됐을 겁니다.

꼭 거창한 타이틀을 거머쥘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의 핵심 한 분야만 잘해도 됩니다. 거기서 오랫동안 할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집니다. 결국 좋아하는 일을 깊게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 핵심 한 분야에 대해서는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할 수 있습니다.

엑셀을 아주 잘 활용하는 후배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업무든 일상적인 것이든 엑셀로 만드는 일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선배 업무 일정을 짜는 프로그램도 만들어주고, 팀장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엑셀과 연동하는 신공도 보여줍니다. 사내 회의에서 그 능력을 눈여겨본 다른 부서 부장님이 그를 자기 부서로 스카우트를 해서 퀀트분석을 전담시켰고, 결국 그는 좋아하는 일을 더욱 깊게 파서 퀀트애널리스트로 20년 이상 명성을 떨쳤습니다.

결국 한 분야를 깊게 파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는 대체 불능의 수준이 되거나, 나 자신을 대체비용이 매우 큰 존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게 되면, 직책이든, 연봉이든 다른 것은 모두 다 따라옵니다. 두려워 말고 좋아하는 일 그 한 가지를, 오랫동안 잘 할 수 있게 깊게 파 보세요

<한경닷컴 The Moneyist> 이윤학 전 BNK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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