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어 틴달(Blair Tindall)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한 화제의 미국 드라마 ‘모차르트 인 더 정글(Mozart in the Jungle)’에는 뉴욕의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주인공 헤일리 러틀리지는 줄리어드 음대 출신의 실력 있는 젊은 오보에 연주자로 등장한다. 작은 기회라도 얻기 위해 불이익을 감내하며 최선을 다하지만 경쟁 길은 험난하다.
줄리아드 음대 / 사진. ⓒThe Juilliard School
줄리아드 음대 / 사진. ⓒThe Juilliard School
‘줄리어드(Juilliard)’는 세계를 대표하는 명문 음대의 대명사이다. 첼리스트 요요 마,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 작곡가 존 윌리엄스,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 등을 비롯해 정경화, 정명훈, 백건우, 홍혜경, 사라 장, 장한나, 선우예권 그리고 김봄소리와 같은 한국 아티스트에 이르기까지, 유명 음악가들 가운데 줄리어드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거장들을 길러냈다.

2021년, 작곡가 데이비드 루드비히(David Ludwig)가 줄리어드 음대 학장으로 부임했다. 미국 대학 학장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기부금을 모으는 일이지만, 루드비히 학장은 약간 다르다. 그는 실질적인 살림을 꾸리는 일보다는 줄리어드가 예술적 탁월성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바버라 해니건과 줄리어드 오케스트라 / 사진. ⓒRachel Papo
바버라 해니건과 줄리어드 오케스트라 / 사진. ⓒRachel Papo
“작곡가는 먹이사슬 생태계의 제일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극작가의 운명도 그렇잖아요. 누군가 내가 쓴 대본으로 연기를 하지 않으면, 그 대본은 그냥 서랍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부분일 수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학교는 이상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드비히 학장은 줄리어드에 대해 ‘사각 링에 던져진 천재들이 최종 승자를 가리는 곳’이라는 편견이 존재한다며,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동료를 밀쳐내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줄리어드 공동체(Juilliard community)야말로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돕고 배려하는 따뜻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데이비드 루드비히 / 사진. ⓒ김동민
데이비드 루드비히 / 사진. ⓒ김동민
음대 중에는 실기 교육에 중점을 둔 콘서바토리(conservatory) 형태의 학교가 있고, 종합대학의 시스템에 속해서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업을 따라가야만 하는 곳도 있다. 소수정예 학교로 알려진 커티스 음악원이 첫 번째에 해당한다면 인디애나 대학교 제이콥스 음대는 두 번째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교이다. 루드비히 학장은 줄리어드가 이 둘의 장점이 적절히 혼합된 형태의 학교라고 말했다.

“현재 줄리어드에는 학생들을 돕는 전문 심리학자가 14명 상주합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는 3명뿐이었죠. 학생들이 느끼는 필요는 점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학업과 연주 두 가지 모두를 제대로 하려면 학생들의 노력에 더해 시스템을 통한 유연한 지원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줄리어드 음대의 앨리스 툴리 홀  / 사진. ⓒAjay Suresh
줄리어드 음대의 앨리스 툴리 홀 / 사진. ⓒAjay Suresh
루드비히 학장은 미 중부 오하이오 주 소재 오벌린 대학에서 학부를 마친 후, 맨해튼 음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최종 계획은 줄리어드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었다. 반면 지도교수 리처드 다니엘푸어(Richard Danielpour)는 줄리어드 대신, 커티스 음악원 아티스트 디플로마(최고연주자과정)를 권했다.

학업의 부담을 덜고 작곡 테크닉을 여유 있게 배우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남쪽으로 160킬로미터 떨어진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커티스 음악원은 재학생 전체에게 전액 장학금 혜택이 주어지는 곳이다. 합격률도 5%대로, 아이비 대학들보다 합격이 어렵다. 힐러리 한, 랑랑, 유자 왕 등이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등 떠밀리듯 진학했던 커티스에서의 4년은 그가 교육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니엘푸어 선생님이 커티스에서 니드 로렘(Ned Rorem) 교수와 공부하라고 제안하셨을 때, 저는 제 계획을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스물다섯에 박사를 받고 나면, 그다음에는 뭘 할 거냐’는 질문을 던지셨는데, 제가 아무 답을 못했어요. 그래서 학위를 빨리 받는 것만큼 중요한 뭔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죠."
데이비드 루드비히 / 사진. ⓒ김동민
데이비드 루드비히 / 사진. ⓒ김동민
몇 년 후, 그는 아스펜 음악제에서 존 코릴리아노(John Corigliano)를 만났다. 존 코릴리아노는 영화 ‘레드 바이올린’의 작곡가로, 오스카와 그래미 상을 수상했고, 화려하고 활력 넘치는 작풍을 자랑하는 미국의 대표 작곡가이다.

루드비히 학장은 코릴리아노 교수가 가르치는 줄리어드 대학원 디플로마 과정으로 진학해 공부하던 중, 필라델피아 인근에 위치한 187년 전통의 체니 대학(Cheyney University)의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이후 모교인 커티스의 작곡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이후 작곡과장으로 10년 동안 재직하며 학교의 예술감독(Dean of Artistic Programs) 겸, 총장 예술자문(Artistic Advisor to the President)의 역할까지 맡았다.

“저는 오벌린에서 시작해, 맨해튼, 비엔나, 커티스, 줄리어드, 그리고 박사 학위를 받은 유펜(펜실베이니아 대학)까지 여러 학교를 거쳤어요. 한 곳에서 깊이 공부하는 것도 유익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도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작곡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줄리어드 음대의 Historical Performance / 사진. ⓒThe Juilliard School
줄리어드 음대의 Historical Performance / 사진. ⓒThe Juilliard School
줄리어드를 능가하는 규모나 시설, 그리고 역사적 전통을 갖춘 음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오늘날의 위상을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은 최고 수준의 교수진과 풍부한 연주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루드비히 학장은 강조한다. 줄리어드는 링컨센터 캠퍼스에 속해 있다. 카네기홀과의 거리도 1㎞에 불과하다. 학생들은 링컨센터나 카네기홀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갖고, 학교는 뉴욕을 오가는 거장들을 초청해 학생들과의 접촉점을 만든다. 세계로 통하는 아티스트의 관문이자 문화의 중심에서 줄리어드는 거대 중력장처럼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인천공항에 내려 택시를 잡아 탄 적이 있는데, 차 안에서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이 흘러나왔어요. 한국의 클래식 음악은 수준도 매우 높고, 미국보다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주목할만한 움직임이 시작됐지만, 한국은 깊은 역사와 유산을 자랑하죠. 제 작품 중에는 국악기 피리를 위해 쓴 곡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곡가들 중에 한국적인 목소리를 담아내는 시도에 주목하게 됩니다. 작곡가 김택수 같은 인물이 좋은 예죠.”
줄리어드 댄스 / ⓒThe Juilliard School
줄리어드 댄스 / ⓒThe Juilliard School
줄리어드는 이미 1950년대부터 음악을 비롯해 댄스와 드라마 디비전을 설립했다. 영화 ‘슈퍼맨’ 시리즈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를 비롯해 로빈 윌리엄스, 케빈 스페이시와 같은 배우들과 현대 무용의 선구자인 폴 테일러나 세계적인 안무가로 손꼽히는 카일 아브라함 역시 이곳에서 공부했다.

하나의 건물 안에 세 디비전이 공존하며 학생들이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이 줄리어드 음대의 또 하나의 차별점이다. ‘줄리어드 예비학교’로 알려진 프리컬리지(pre-college)는 영재들의 산실로 자리잡았으며, 바로크 시대와 그 이전 시기를 다루는 고음악 분야나, 재즈 음악 역시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현재 줄리어드는 재학생 전체에게 전액 장학금을 제공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김동민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