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제왕.’

오랜 기간 미국 중앙처리장치(CPU) 전문 기업 인텔에 따라붙은 수식어다. 사람들은 PC를 살 때 브랜드보다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스티커부터 찾았다. 지금은 아니다. 시가총액만 봐도 알 수 있다. 1일(현지시간) 인텔의 시가총액은 1236억6000만달러로 ‘싸구려 CPU 기업’이라고 얕잡아본 AMD(2145억1000만달러)의 절반에 불과하다.

급기야 인텔은 이날 장 마감 후 연 실적설명회에서 전체 직원의 약 15%인 1만5000명을 해고하고, 투자도 대폭 줄이는 구조조정 대책을 내놨다. 2016년 이후 8년 만의 대규모 구조조정이다. 이날 시간 외 거래에서 인텔 주가는 18.9% 곤두박질쳤다. 인텔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구조조정 인텔, 승승장구 AMD…'CPU 투톱' 엇갈린 운명

○AI 트렌드에서 소외된 인텔

이날 인텔의 실적 설명회 분위기는 시종일관 무거웠다.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실적이 실망스러웠다”고 고백했다. 올 2분기 매출(128억3000만달러)이 1년 전(129억달러)보다 줄었고, 순이익은 14억8100만달러 흑자에서 16억1000만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역량을 쏟아부은 데이터센터·인공지능(AI) 부문 매출(30억5000만달러)도 기대 이하였다. 인텔은 올해 설비투자를 연초 대비 20% 줄인 250억~270억달러로 낮췄다. 겔싱어 CEO는 “AI 흐름을 타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AMD는 2분기에 순이익(2억6500만달러)이 881% 늘었다.

업계에선 인텔의 경쟁력이 약화한 근본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 번째는 ‘기술 주도권’을 놓친 것이다. 2013년 취임한 ‘재무통 CEO’ 브라이언 크러재니치는 엔지니어들에게 원가 절감과 단기 성과를 요구했다. PC산업 성장률이 꺾인 2016년엔 1만2000여 명을 해고했다. 인텔에서 쫓겨난 엔지니어들은 경쟁사로 옮겼다. 기술 주도권보다 사업 효율화를 앞세우는 경영 방침은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 CEO인 밥 스완 재임 기간(2018~2020년) 때까지 이어졌다.

인텔이 단기 성과를 따지던 그 시기에 AMD는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출신 엔지니어 리사 수(2014~)를 CEO 자리에 앉혔다. 수 CEO는 “MIT 박사(엔지니어)가 하버드 MBA(경영학 석사) 밑에서 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며 기술 경영에 고삐를 조였다. 10년 전 한 자릿수였던 AMD의 서버용 CPU 점유율은 지난 1분기 24%로 뛰었다. 인텔 점유율은 그만큼 떨어졌다.

○‘사골국물’처럼 우려먹는 기술

기술에 대한 과신도 인텔의 경쟁력을 갉아먹은 원인으로 꼽힌다. 인텔은 2019년까지 14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으로 CPU를 제조하면서도 “인텔의 14㎚ 공정이 대만 TSMC나 삼성전자의 7㎚ 공정보다 낫다”고 큰소리쳤다. 업계에서 “14㎚ 공정을 사골국물처럼 너무 오래 우려먹는다”고 힐난해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AMD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TSMC에 칩 생산을 맡긴 뒤 “최첨단 공정에서 만든 제품”이라며 인텔 고객을 하나둘 빼왔다. 인텔이 2021년 10㎚ 공정에서 양산을 시작했지만 이미 많은 고객을 잃은 뒤였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진출도 패착이란 평가가 많다. 인텔은 2021년 파운드리 진출을 선언하고 공장 건설에 200억달러를 투입했지만, 역량이 분산되면서 오히려 주력 사업(CPU)이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파운드리 분야 적자는 최소 2~3년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반도체 제왕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란 시각도 많다. CPU 설계 능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인 데다 엔지니어 출신 겔싱어가 2021년 CEO로 취임한 뒤 기술 주도권을 되찾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어서다. 자국 반도체 기업을 밀어주는 ‘팀 아메리카’도 이런 전망에 힘을 보태는 대목이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