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스스로 우리 눈 찌른 '엘리엇 사태'
6년 넘게 이어온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의 분쟁에서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법무부가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S) 판정 취소 소송이 지난 주말 각하됐다. 항소가 가능하다지만, 작년 6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손해배상 판정에 이은 2연속 패배다. 우리 정부는 말 그대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패배가 확정되면 배상원금 5359만달러(약 690억원)와 지연이자를 포함해 1500억원 안팎의 혈세 손실이 예상된다. 행동주의 펀드에 굴복한 첫 아시아 국가라는 오명은 덤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권력 게임으로 끌어들인 정치의 책임이 적잖다. 문재인 정부의 보건복지부는 적폐청산위원회를 꾸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기도 전에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을 적폐로 규정했다. 엘리엇의 ISDS 소송 제기를 부채질하는 행태였다.

‘팩트’보다 정치권과 여론 풍향을 더 의식한 검찰 수사도 돌아볼 대목이 적잖다. 검찰의 증거 취사선택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 본부장 등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게 ISDS 패소의 결정적 빌미가 됐다. 이후 일성신약 등 여러 민사소송에선 잇단 무죄 취지 판결이 내려졌다. 적폐 청산 광풍이 끝난 올 2월엔 삼성물산 시세 조종, 허위정보 유포 등으로 기소된 14명이 뒤늦게 전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ISDS 판정이 내려진, ‘버스 지나간 뒤’의 일이 되고 말았다.

정부는 취소 소송 항소를 검토 중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발 방지다. 정치가 기업 합병 같은 경영적 판단에 개입해 검찰을 불러내는 일은 다시 없어야 한다. 엘리엇은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한국의 허점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이 와중에 과거 검찰에 맞서 펼친 삼성 측 방어논리가 이제는 엘리엇에 맞선 법무부의 방어논리로 옮겨가는 역설적 상황이다. 당시 검찰 수사가 얼마나 무리하게 이뤄졌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혹여 나중에 배상하는 날이 오더라도 무엇이,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규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엘리엇 같은 벌처펀드에 다시 당하지 않는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