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부터 '식객'까지…50년 만화 인생 허영만 "이제 웹툰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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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 '종이의 영웅, 칸의 서사'
전남도립미술관서 10월20일까지
전남도립미술관서 10월20일까지
"허영만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다른 이름으로 연재할 계획이 있습니다. 그동안 계속해온 종이 만화가 아니라 웹툰으로요."
원로 만화가 허영만(77)이 각시탈을 쓴다. 가면을 쓴 주인공이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는 그의 1974년 작 '각시탈' 얘기가 아니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노(老)작가 본인이 정체를 감추고 남몰래 도전하겠다는 얘기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그는 "이미 3~4개월 치 원고를 준비했다"며 "나의 방식이 웹툰 플랫폼에서도 통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허영만 작가의 반세기 만화 여정을 돌아보기 위한 전시 '종이의 영웅, 칸의 서사'가 6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렸다. 1970년대 초기작부터 2010년대 후반 '만화 일기'까지 원화와 드로잉, 취재 자료 등 2만여점을 선보인다. 전남 여수에서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모두 나온 지역 작가의 화업을 기념하는 취지다.
중장년층이라면 그의 만화가 실린 손때묻은 어린이 잡지를 기억할 만하다. 질풍노도의 X세대를 포착한 '비트', 1990년대생들의 안방극장을 책임진 TV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가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타짜', '식객' 등 대표작들은 종이를 넘어 영화와 드라마로 영역을 넓히며 재탄생했다. 세대를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비결로는 평범함을 꼽았다. "저의 작품에는 '슈퍼스타'가 없어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자분들이 편하게 다가와 주신 것 같습니다." '오! 한강'과 '각시탈' 등 여러 작품에서 주인공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강토'는 극장에서 들은 애국가의 한 소절에서 따왔다.
늘 만화계의 정상을 지켜왔지만, 그는 '만년 2위'라며 자신을 낮췄다. "이전에는 이상무 선생이 1등이었고, 그다음 이현세 선생이 나타났어요. 오래 하다 보니까 저만 남은 것 같아요. 소재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이 이유라면 이유일까요. 밥을 먹다가 휴지에 고추장을 묻혀서 아이디어를 메모한 적도 있죠." 꼼꼼한 취재도 빼놓을 수 없다. '식객'을 연재하기 전 자료조사에만 꼬박 3년이 걸렸다. 월 65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원고료를 받았지만, 취재 경비로 금세 바닥났다. 오히려 이전까지 모아둔 목돈이 반년 만에 동났을 정도였다. "'소고기 전쟁' 에피소드를 연재할 때, 소의 이빨을 잘못 그렸다가 독자한테 지적 받은 적이 있어요. 소의 윗니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죠. 취재에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만화가를 꿈꾼 건 아니다. 가족의 멸치어장 사업이 불황을 겪으며 가세가 기울었다. 여덟 남매 중 셋째였다. '누가 너 대학 보내준다더냐'란 선친의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편이 아린단다.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데는 졸업장이 필요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 교과서 대신 스케치북을 들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린 원고만 12만장이 넘는다. 많은 게 변했다. 작가는 만화가 '유해 콘텐츠'로 배척되며 '만화 화형식'을 당하던 시절에 데뷔했다. "프랑스에선 만화를 '제9의 예술'로 부르지만, 아직 국내에선 낯선 표현인 것 같아요. 도립미술관 차원에서 만화를 전시하는 것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요즘도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작업실로 향한다. '식객'으로 이름난 그답게 저녁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잔을 기울인다. 다음날 루틴에 차질을 빚지 않게끔 "죽어도 2차는 안 간다"란 말을 달고 산다고. 전시장 한편에 재현한 그의 작업실 책상에는 '술: 1잔(소주 물타서). 이행을 약속하기 위해 적는다잉'이란 메모가 붙어있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은 '나는 책상 위에서 글을 쓰다가 죽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저도 화판 위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죽고 싶어요. 웹툰 작가들이 '종이 만화 그리던 허영만이란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해주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내년 여수에 허영만 만화기념관이 개관한다.
광양=안시욱 기자
원로 만화가 허영만(77)이 각시탈을 쓴다. 가면을 쓴 주인공이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는 그의 1974년 작 '각시탈' 얘기가 아니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노(老)작가 본인이 정체를 감추고 남몰래 도전하겠다는 얘기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그는 "이미 3~4개월 치 원고를 준비했다"며 "나의 방식이 웹툰 플랫폼에서도 통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허영만 작가의 반세기 만화 여정을 돌아보기 위한 전시 '종이의 영웅, 칸의 서사'가 6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렸다. 1970년대 초기작부터 2010년대 후반 '만화 일기'까지 원화와 드로잉, 취재 자료 등 2만여점을 선보인다. 전남 여수에서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모두 나온 지역 작가의 화업을 기념하는 취지다.
중장년층이라면 그의 만화가 실린 손때묻은 어린이 잡지를 기억할 만하다. 질풍노도의 X세대를 포착한 '비트', 1990년대생들의 안방극장을 책임진 TV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가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타짜', '식객' 등 대표작들은 종이를 넘어 영화와 드라마로 영역을 넓히며 재탄생했다. 세대를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비결로는 평범함을 꼽았다. "저의 작품에는 '슈퍼스타'가 없어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자분들이 편하게 다가와 주신 것 같습니다." '오! 한강'과 '각시탈' 등 여러 작품에서 주인공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강토'는 극장에서 들은 애국가의 한 소절에서 따왔다.
늘 만화계의 정상을 지켜왔지만, 그는 '만년 2위'라며 자신을 낮췄다. "이전에는 이상무 선생이 1등이었고, 그다음 이현세 선생이 나타났어요. 오래 하다 보니까 저만 남은 것 같아요. 소재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이 이유라면 이유일까요. 밥을 먹다가 휴지에 고추장을 묻혀서 아이디어를 메모한 적도 있죠." 꼼꼼한 취재도 빼놓을 수 없다. '식객'을 연재하기 전 자료조사에만 꼬박 3년이 걸렸다. 월 65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원고료를 받았지만, 취재 경비로 금세 바닥났다. 오히려 이전까지 모아둔 목돈이 반년 만에 동났을 정도였다. "'소고기 전쟁' 에피소드를 연재할 때, 소의 이빨을 잘못 그렸다가 독자한테 지적 받은 적이 있어요. 소의 윗니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죠. 취재에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만화가를 꿈꾼 건 아니다. 가족의 멸치어장 사업이 불황을 겪으며 가세가 기울었다. 여덟 남매 중 셋째였다. '누가 너 대학 보내준다더냐'란 선친의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편이 아린단다.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데는 졸업장이 필요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 교과서 대신 스케치북을 들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린 원고만 12만장이 넘는다. 많은 게 변했다. 작가는 만화가 '유해 콘텐츠'로 배척되며 '만화 화형식'을 당하던 시절에 데뷔했다. "프랑스에선 만화를 '제9의 예술'로 부르지만, 아직 국내에선 낯선 표현인 것 같아요. 도립미술관 차원에서 만화를 전시하는 것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요즘도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작업실로 향한다. '식객'으로 이름난 그답게 저녁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잔을 기울인다. 다음날 루틴에 차질을 빚지 않게끔 "죽어도 2차는 안 간다"란 말을 달고 산다고. 전시장 한편에 재현한 그의 작업실 책상에는 '술: 1잔(소주 물타서). 이행을 약속하기 위해 적는다잉'이란 메모가 붙어있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은 '나는 책상 위에서 글을 쓰다가 죽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저도 화판 위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죽고 싶어요. 웹툰 작가들이 '종이 만화 그리던 허영만이란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해주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내년 여수에 허영만 만화기념관이 개관한다.
광양=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