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사람이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다. ‘Behind the Scenes’이라는 제목 아래 음악가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쓰려고 하다 보면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당연히 다시 되짚어 보게 된다. 끊임없이 이어진 관계도 있지만 그냥 서로의 존재만 인식하고 지내는 경우도 있다. 사진과 얽힌 기억에 관한 글이라 옷장 속 가끔 꺼내 입는 옷처럼 가벼이 여겨주길 바라며 쓴다. 즉흥적인 성격이라 갑자기 떠오른 음악가나 단체와 관련한 생각을 적는 편인데, 가뜩이나 기억력도 좋지 않은 판에 내 서랍장 속처럼 어수선한 기억을 더듬으려니 가끔은 헷갈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연주자 이야기를 쓰고 싶다 해서 글이 술술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자료와 내용도 있어야 하고, 보관된 사진이 다 남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니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에 문제가 생긴다. 진정으로 원하지 않고 그런 척만 하는 관계는 싫기 때문이다.

저장해놓은 사진 파일에서 누군가를 끄집어내서 들여다보노라면 많은 생각이 든다. 사진을 찍을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 때가 많은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기분 좋은 기억들이다. 이렇게 기억을 되짚다 보면 내가 많은 음악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멋모르고 촬영한 사진들 덕에 이런 글을 쓰게 되었고, 내가 지금까지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음악가들에게서 감성과 영감을 얻은 덕분이 아닐까 싶어진다. 이런 특별한 인연에 대해 나는 늘 감사한다.

실내악 공연을 촬영할 때는 독주회 때와는 다른 의문이 생기곤 한다. 팀 내부의 불화는 어떻게 해결할까? 이 팀은 현재 구성으로 언제까지 갈까? 영화 <마지막 4중주>에서 이 주제를 깊이 다루기는 했지만, 어느 실내악단에나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어쨌든 실내악단도 하나의 팀이고, 팀이란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함께 공동의 이상을 좇는 과정이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을 함께함으로써 시너지가 나오는 것, 누군가 놓친 것도 메꾸어 줄 수 있는 것, 그게 팀이 아닐까. 팀이 하나로 뭉치려면 서로 신뢰하고 인정해야 하며, 이런 것이 있어야 비로소 좋은 연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무서운 건 팀의 해체가 아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그것이 뭔지 모른다는 거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남이 대체할 수 없는 개성을 지닌 악단들이 많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글을 적는다. 가끔 실내악 공연을 촬영할 때 연주자들이 서로 응시하면서 신호를 주고받는 모습을 찍을 때가 있다. 그런 때 그들의 얼굴과 눈빛에는 항상 서로를 향한 신뢰가 깃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SORI)’는 한국 최초의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이다. 올해로 창단 23주년을 맞는 단체이다. 초창기 즈음에 이 단체에 소속된 몇몇 음악가와 친해지면서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그들의 공연을 보러 간다. 그 인연으로 이 단체를 몇 번 촬영했는데, 이들이 2013년에 제작한 포스터의 이미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개개인 이미지를 하나로 중첩해 같은 방향으로 걷는 모양을 만든 것이다. 나란히 함께 간다는 의미의 표현이었다.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2013년 제작 포스터) / 사진. ©구본숙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2013년 제작 포스터) / 사진. ©구본숙
현대음악앙상블 ‘소리’는 2001년 11월 12일 故 박창원 음악감독과 첼리스트 현민자의 “우리도 프랑스 현대음악의 전설, 피에르 불레즈가 창단한 세계 최정상 현대음악 단체로 꼽히는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 (Ensemble Intercontemporain)' 같은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를 만들어보자”는 의기투합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국내외 가리지 않고 선별된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고 위촉, 초연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단체 중 하나이다. 이미 현대음악 애호가 사이에서는 유명하지만, 그 범주를 넘어 더 폭넓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면 하고 응원하는 팀이다.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선보이고, 난해하기도 하지만 개성 있고 창의적인 곡들로 매번 다채롭고 특별한 연주를 선사하는 단체이기에 그렇다.

2010년 2월 이들의 스페인 투어에 동행한 적이 있다. 바르셀로나(Barcelona), 레우스(Reus), 타라고나(Tarragona) 세 곳에서 연주하는 일정이었는데, 단원들이 리허설을 시작하면 나는 음악감독이었던 박창원 선생님이랑 간식을 사러 나가서 중세 분위기의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야외 카페에 일단 앉곤 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서로 싱거운 수다를 늘어놓으면서 깔깔거리다가 다른 단원들이 마실 음료를 배달했다.
스페인 타라고나 / 사진. ©구본숙
스페인 타라고나 / 사진. ©구본숙
지금도 그때 방문했던 세 도시의 인상이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레우스는 그야말로 옛 스페인풍의 건물들이 가득한 작고 예쁜 마을이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타라고나는 열차 역 너머로 드넓은 지중해가 보이고, 지금도 천년 제국 로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였다. 검투사들이 처참한 싸움을 벌였을 원형경기장은 이제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았다. 이외에도 타라고나 대성당, 악마의 다리(Pont del Diable)라고 불리는 레스 페레레스 수도교 등을 둘러봤다. 공연을 마치고 나면 밤마다 우리는 가벼운 음주와 담소를 나눴고 매일이 활기찼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냥 아름다운 밤들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연주가 없을 땐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구엘 공원을 방문해서 그의 천재성에 놀라고 우아한 장식과 색채에, 자연과 하나 되는 디테일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가우디의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바르셀로나의 분위기 자체가 너무나 근사했다. 구시가지의 좁은 거리에 들어서니 가우디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Domenech i Montaner)가 지은 카탈루냐 음악당이 나왔다. 섬세한 조각상들과 독특한 타일 장식이 인상적인 그 건물은 과연 모더니즘의 꽃이라 불릴 만했다.

푸니쿨라(산악열차)를 타고 간 웅장한 바위산 중턱에 서 있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몬세라토 수도원은 많은 순례자들이 오는 곳이었다.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검은 성모상은 독특하고 신비로우며 아름답기까지 했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을 때 엄청난 탑 높이의 무게를 지탱할 기둥 때문에 고민에 빠졌을 때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나무를 보고 나뭇가지 기둥 모양을 생각해 낸 일화가 있고, 저 유명한 카사 밀라 역시 원래 바다였다가 융기해서 바람에 깎여 톱니바퀴처럼 변한 몬세라토 산을 보면서 바다와 파도에 대한 영감을 얻어 그렇게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위] 바위산 중턱의 몬세라트 수도원 [아래] 몬세라트 수도원의 검은 성모상 / 사진. ©구본숙
[위] 바위산 중턱의 몬세라트 수도원 [아래] 몬세라트 수도원의 검은 성모상 / 사진. ©구본숙
우린 함께 산살바도르에 있는 파우 카잘스 박물관(Pau Casals Museum)을 방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파블로 카잘스’라는 표기가 더 유명하지만, 카탈루냐 사람이었던 만큼 카탈루냐식으로 부르는 게 이 거장 첼리스트에게 걸맞은 예의일 것이다. 사진작가인 나로서는 유서프 카쉬(Yousuf Karsh, 1908~2002)가 찍은 뒷모습으로도 알게 된 사람이다. 이 사진은 프라도의 쿡사 수도원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파우 카잘스 박물관. 유서프 카쉬가 찍은 카잘스의 뒷모습 / 사진. ©구본숙
파우 카잘스 박물관. 유서프 카쉬가 찍은 카잘스의 뒷모습 / 사진. ©구본숙
카잘스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도 생각난다. “어쩌면 나는 많은 사람의 생각만큼 종교적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식이 있다면 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깨어 있을 때 신을 발견합니다. 일어나자마자 바다로 나가면 사방이 신입니다. 크고 작은 것에 모두 들어 있어요. 나는 신을 색깔과 디자인, 형태로 봅니다.” 색깔과 디자인, 형태. 이 모든 것은 내게도 무척 친숙한 주제들이다. 나도 카잘스처럼 언젠가는 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될까? 근래 들어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주제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카잘스가 늘 산책했다던 카탈루냐의 해변을 나도 걸어보았다.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게 있을까 해서….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적막하기만 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Quo vadis, Domine?)'
카잘스가 산책하던 해변이 보이는 창가 / 사진. ©구본숙
카잘스가 산책하던 해변이 보이는 창가 / 사진. ©구본숙
최근 강원도를 다녀왔다. 가는 동안 길가의 풍경이 다채롭게 변하고,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있어서 머리 식히러 가기 정말 좋다. 그리고 이번까지 치면 세 번째 방문이 된 사찰이 있다. 나는 종교가 없다. 자연이나 어떤 분위기가 나를 이끌면 나라나 지역에 상관없이 종교적인 장소에 가보는 편인데 문득 여기가 생각나서 목적지로 정했다. 왕금산 줄기가 양 갈래로 나뉘어 둘러싸고 있는 현불사(見佛寺)라는 사찰인데, 이곳은 풍수에서 말하는 ‘금계포란’, 이른바 황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이 사찰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런 입지에서 비롯한 안정적인 느낌도 있지만 일반 사찰에 반드시 있을 법한 것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담도 없고, 법당 벽면에 단청도 없고, 일주문도 없다. 이 대웅전에는 보통의 불상과 다르게 백옥(白玉)으로 된 높이 3.3m의 거대한 불상이 법당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의 백옥 광산에서 캐와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서둘렀는데도 현불사에 도착하니 저녁 5시가 좀 넘었다. 대웅전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당황했으나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 방문이 열려있길래 가보니 주지 스님께서 혼자 계셨다. 대웅전 부처님을 촬영하고 싶어서 왔다 하니 손수 문을 열어주시고, 편히 시간을 보내다가 다 끝나면 차나 한잔 하고 가라신다. 더위도 식히고 일단 혼자서 희고 거대한 부처님을 한참 바라보았다. 조용한 산사,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서 부처님과 나 둘뿐이었다. 부처님의 시선을 따라 정원을 향하는 중앙문을 활짝 열고 해 지는 저녁 빛을 들이니 법당 안이 훨씬 환해지며 충만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 착각에 빠지며 그럴싸해 보인다.
현불사 대웅전의 불상 / 사진. ©구본숙
현불사 대웅전의 불상 / 사진. ©구본숙
어둠이 빠르게 산사에 내려앉고 열어 놓은 문 사이로 바람이 살랑 들어오는데, 갑자기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라는 책과 카잘스가 생각났다. 법정 스님은 카잘스를 흠모해서 그는 단순히 첼리스트가 아니라 위대한 인류의 양심이라고 말씀하셨다. 노년까지도 카잘스는 첼리스트로서의 자리를 초월해 세계평화 운동까지 힘쓴 인물이니 당연 그리 말씀하셨으리라 생각된다. 카잘스가 처음 접한 뒤 평생 매일 연주했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을 마치고 나서 주지 스님께 갔다. 녹차를 마시면서 스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겁 없이 막 물었는데 그걸 또 웃으시면서 다 대답해주신다. 자주 놀러 오고, 땅이 넓으니 문화적인 공간으로 쓰고 싶으면 쓰라신다. 이번엔 내가 무척 웃으면서 ‘제가 가진 깜이 그게 될까요?’ 하고 답해드렸다.

현불사에 담으로 경계를 만들거나 법당을 굳이 채색하지 않고, 일주문도 세우지 않은 것은 승과 속의 경계도 허물고, 불필요한 것들을 줄이라는 가르침을 말하는 거란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질 것이니… 법당인 진묘원(眞妙院)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깨달음을 얻는 곳이란다. 진공은 진짜 진(眞)과 없을 공(空)이다. 진짜 없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은 것은 진짜 없다? 어떤 사물도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늘 변하니, 그 변하고 생성한다는 것이 묘유의 의미라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생성하고 변형하고 소멸한다. 그러니 뭐든 변치 않을 것처럼 집착하지 말고, 쓸데없는 것들은 버리라는 뜻인 것이다.
파우 카잘스 박물관. 첼로와 바흐 악보 / 사진.©구본숙
파우 카잘스 박물관. 첼로와 바흐 악보 / 사진.©구본숙
첼리스트들의 성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카잘스의 하루를 여는 음악이었다고 한다. 평생을 아름다움과 진실, 정의를 위해서 헌신한 진정한 예술가가 평생을 함께한 음악. 그날 이 산사(山寺)에서 하루를 마감하면서 나는 왜 이 음악이 갑자기 듣고 싶어졌던 걸까. 내가 접하는 것들,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은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무상함을 사랑한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기에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무상한 인연일지언정 소중히 아끼고 싶다.

구본숙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