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일본이 느리다는 착각
일본 정부가 이제서야 플로피디스크를 없앴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 한국에선 비웃음이 넘쳤다. 한국에서 20년 전에 사라진 유물(遺物) 같은 저장 매체를 아직도 쓰고 있었냐는 반응이었다. ‘디지털 후진국’, ‘아날로그 공화국’이라며 일본을 조롱했다.

일본은 확실히 변화에 느리다. 특히 행정 절차가 그렇다. 인감과 팩스가 필수다. 주재원 등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데 필수인 주소 등록, 계좌 개설, 통신 가입은 ‘3대 고난’으로 불릴 정도다. 개인정보 공개를 꺼리는 일본인 성향 탓에 한국 같은 디지털 행정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서다.

日, 3년 만에 반도체 부활

‘느린 일본’은 거기까지다. 국운이 걸린 문제에선 180도 바뀐다. ‘반도체 부활’ 작전이 대표적이다. 시작은 2021년 5월 출범한 일본 집권 자민당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이다. 자민당 실세이자 경제통인 아마리 아키라 중의원 아래 100명이 모였다.

의원연맹은 수조엔 규모의 예산 지원을 요청하며 정부를 설득했다. 2021년 반도체 부활 자금으로 우선 2조엔을 확보했고 정부·여당은 그해 10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를 유치했다.

일본 정부는 TSMC 구마모토 1공장 투자비의 절반에 가까운 4760억엔을 보조금으로 지급했다. 구마모토현은 365일 24시간 ‘광속 공사’를 지원해 5년 걸릴 반도체 공장을 20개월 만에 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 2월 공장 개소식에서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일본 반도체 제조의 르네상스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빠른 한국’은 정반대다. 지난해 경기 서안성 변전소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잇는 23.5㎞ 길이 송전선로를 완공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SK하이닉스는 2019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를 선정하고도 용수 문제 등으로 착공이 다섯 차례 연기돼 내년에나 첫 삽을 뜬다. 지역 주민 등 이해관계자 갈등 속 극단의 소극 행정에 발목이 잡혔다.

한국은 정쟁에 허송세월

일본 정부·여당도 고민은 있다. 거액의 세금을 TSMC 같은 외국 기업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이해할지 여부다. 구마모토를 중심으로 규슈 지역 경제는 들썩이고 있지만 일본 경제 전체 파급에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성과에 대한 의문은 계속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담당한 관료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까진 묻지 않는 것이 일본이다.

한국은 자국 기업에 대한 지원조차 ‘대기업 특혜’ 프레임에 갇혀 있다. 지난 5월 막을 내린 21대 국회에선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세액공제 연장을 담은 K칩스법 등이 무더기로 폐기됐다. 22대 국회도 각종 반도체 산업 지원 법안을 쏟아내고 있지만 개원 두 달간 정쟁에 골몰한 채 관련 법안 심사는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일본은 또 치고 나가고 있다. TSMC 구마모토 2공장에 7320억엔을 지원해 연내 착공한다. 자국 ‘반도체 연합군’ 라피더스에는 9200억엔에 더해 양산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돕기 위한 대출 보증까지 서는 방안을 추진한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해 2021년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4조엔을 확보했다. 아마리 의원연맹 회장은 올해도 정부에 ‘차원이 다른 지원의 지속’을 요구했다. 이 모든 것이 3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플로피디스크를 쓰던 나라’라고 깔볼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