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한 덴마크 왕자,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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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상우의 아주 사적인 연극일기
연극 '햄릿'
홍익대학교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극 '햄릿'
홍익대학교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이곳에 기고한 칼럼 중 세 편이 체홉의 작품이었다. 그의 희곡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을 텐데 여기 체홉보다도 더 많이 공연되는 희곡이 있다. 짐작하다시피 바로 셰익스피어이다. 세계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이자 영국 문화의 자존심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연극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고 재생산되며 시대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체홉의 희곡이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건져내는 리얼리즘의 정수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에서는 음모, 살인, 배신이 난무한다. 그 드라마틱한 세상에서 인물들은 주옥같은 시의 언어로 대사를 읊어대니 어찌 쏙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이 다 재미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아마 햄릿일 것이다. 나도 이 작품을 몇 번째 보는지 잘 모르겠다. 이번에 햄릿을 무대에 올린 신시컴퍼니는 이해랑 연출가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16년에 햄릿 초연을 했고 2022년에 재공연을 가졌다. 초연 때 햄릿을 맡았던 유인촌 배우가 2022년에는 숙부 클로디어스 역을 맡았으며 젊은 강필석 배우가 햄릿을 맡았다. 이번 무대 역시 손진책 연출로 연기 장인들이 대거 출연했다. 내가 본 날은 오랜만에 보는 길용우 님이 클로디어스, 길해연 배우가 거트루드를 맡았고 이승주 배우가 햄릿을 맡았다. 전무송, 박정자, 정동환, 손숙, 박지일, 남명렬 배우도 날짜를 달리하며 출연한다. 내가 햄릿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극의 초반, 숙부가 부친을 살인했을 것이라 의심하는 햄릿이 연극배우들을 불러 그 정황을 연기하게 하는 장면이다. 연극의 기능과 역할을 이렇게 확연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 낮잠 자는 왕의 귀에 독약을 붓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숙부는 충격을 받고 햄릿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는다. 연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실을 반영하되 작품을 통해 현실에 충격을 주는 작업이다. 서사의 시각화를 통해 관객을 사유하게 하고 각성하게 하는 장르이다. 나는 매번 그 유랑극단이 왕과 왕비 앞에서 연기를 펼치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햄릿은 배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에 거울을 비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네. 옳은 건 옳은 대로, 그른 건 그른 대로 고스란히 비추어 그 시대의 양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 이번 무대는 재작년과 같은 연출, 비슷한 캐스팅인데도 당시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구체적으로 삶과 죽음을 대하는 시선이 다소 달라졌다. 아비를 잃은 햄릿, 역시 아비를 잃은 오필리어, 동생 오필리어의 죽음을 마주하는 오빠 레어티즈. 이들은 죽음 앞에서 절규하고 더없이 애통해한다. 그런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죽은 인물들이 이내 스르륵 일어나 산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퇴장한다. 원작의 지문처럼 햄릿이 폴로니어스의 시체를 끌고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폴로니어스가 일어나 햄릿과 함께 걷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폴로니어스는 그의 딸과 아들인 오필리어, 레어티즈와 옹기종기 서있는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증오나 분노의 눈빛을 찾아볼 수 없다. 역시 결국 죽임을 당하는 왕, 클로디어스도 마찬가지다. 나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마음으로 그 장면들을 받아들였다. 죽음이 갈라놓는 이별은 가슴 저미도록 슬픈 일이지만 죽음은 동시에 누구든 평등하고 평온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닐지. 결국 죽음은 온갖 삶의 굴레와 애증에서 해방되는 궁극의 화해와 평화가 아닐는지. 산 자와 죽은 자를 함께 두고 대비시키는 연출의 의도가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햄릿은 무덤 파는 인부들을 보며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도 죽으면 한 줌 흙이 되어 한낱 술병 마개가 되고, 오만한 시저도 흙이 되어 바람벽 구멍 막는 처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사후는 이렇게 허망하도록 공평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죽음은 이렇듯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놓기에 우리는 유한한 인생을 더더욱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죽은 뒤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의미 있는 인생인가. 햄릿을 통해 내가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양심 있는 삶이다. 햄릿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부끄러움 모르는 어머니 왕비 거트루드이다. 아버지가 죽고 그 동생과 결혼한 어머니를 두고 햄릿은 치를 떤다. "불과 한 달, 가엾은 아버님의 시신을 니오베처럼 울며불며 따라갈 때 신었던 그 신발이 채 닳기도 전에 어째서 어머니는, 왜 어머니는……아, 신이시여, 이성 없는 짐승도 이보다는 오래 슬퍼했을 것이다." 염치없기로는 이 시대 이 나라도 만만치 않다. 생때같은 젊은이들과 군인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도 제대로 된 애도와 조사(弔辭)가 없었고, 조상의 귀에 독약을 부었던 나라에는 지금도 잘 보이려고만 하고 있다. 수치를 모르는 클로디어스 왕은 문학 작품에만 있지 않다.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만 하고 있던 우유부단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차마 용인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양심과 상식의 회복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우리 시대의 햄릿이 그립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이 다 재미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아마 햄릿일 것이다. 나도 이 작품을 몇 번째 보는지 잘 모르겠다. 이번에 햄릿을 무대에 올린 신시컴퍼니는 이해랑 연출가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16년에 햄릿 초연을 했고 2022년에 재공연을 가졌다. 초연 때 햄릿을 맡았던 유인촌 배우가 2022년에는 숙부 클로디어스 역을 맡았으며 젊은 강필석 배우가 햄릿을 맡았다. 이번 무대 역시 손진책 연출로 연기 장인들이 대거 출연했다. 내가 본 날은 오랜만에 보는 길용우 님이 클로디어스, 길해연 배우가 거트루드를 맡았고 이승주 배우가 햄릿을 맡았다. 전무송, 박정자, 정동환, 손숙, 박지일, 남명렬 배우도 날짜를 달리하며 출연한다. 내가 햄릿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극의 초반, 숙부가 부친을 살인했을 것이라 의심하는 햄릿이 연극배우들을 불러 그 정황을 연기하게 하는 장면이다. 연극의 기능과 역할을 이렇게 확연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 낮잠 자는 왕의 귀에 독약을 붓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숙부는 충격을 받고 햄릿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는다. 연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실을 반영하되 작품을 통해 현실에 충격을 주는 작업이다. 서사의 시각화를 통해 관객을 사유하게 하고 각성하게 하는 장르이다. 나는 매번 그 유랑극단이 왕과 왕비 앞에서 연기를 펼치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햄릿은 배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에 거울을 비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네. 옳은 건 옳은 대로, 그른 건 그른 대로 고스란히 비추어 그 시대의 양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 이번 무대는 재작년과 같은 연출, 비슷한 캐스팅인데도 당시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구체적으로 삶과 죽음을 대하는 시선이 다소 달라졌다. 아비를 잃은 햄릿, 역시 아비를 잃은 오필리어, 동생 오필리어의 죽음을 마주하는 오빠 레어티즈. 이들은 죽음 앞에서 절규하고 더없이 애통해한다. 그런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죽은 인물들이 이내 스르륵 일어나 산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퇴장한다. 원작의 지문처럼 햄릿이 폴로니어스의 시체를 끌고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폴로니어스가 일어나 햄릿과 함께 걷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폴로니어스는 그의 딸과 아들인 오필리어, 레어티즈와 옹기종기 서있는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증오나 분노의 눈빛을 찾아볼 수 없다. 역시 결국 죽임을 당하는 왕, 클로디어스도 마찬가지다. 나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마음으로 그 장면들을 받아들였다. 죽음이 갈라놓는 이별은 가슴 저미도록 슬픈 일이지만 죽음은 동시에 누구든 평등하고 평온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닐지. 결국 죽음은 온갖 삶의 굴레와 애증에서 해방되는 궁극의 화해와 평화가 아닐는지. 산 자와 죽은 자를 함께 두고 대비시키는 연출의 의도가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햄릿은 무덤 파는 인부들을 보며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도 죽으면 한 줌 흙이 되어 한낱 술병 마개가 되고, 오만한 시저도 흙이 되어 바람벽 구멍 막는 처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사후는 이렇게 허망하도록 공평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죽음은 이렇듯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놓기에 우리는 유한한 인생을 더더욱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죽은 뒤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의미 있는 인생인가. 햄릿을 통해 내가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양심 있는 삶이다. 햄릿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부끄러움 모르는 어머니 왕비 거트루드이다. 아버지가 죽고 그 동생과 결혼한 어머니를 두고 햄릿은 치를 떤다. "불과 한 달, 가엾은 아버님의 시신을 니오베처럼 울며불며 따라갈 때 신었던 그 신발이 채 닳기도 전에 어째서 어머니는, 왜 어머니는……아, 신이시여, 이성 없는 짐승도 이보다는 오래 슬퍼했을 것이다." 염치없기로는 이 시대 이 나라도 만만치 않다. 생때같은 젊은이들과 군인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도 제대로 된 애도와 조사(弔辭)가 없었고, 조상의 귀에 독약을 부었던 나라에는 지금도 잘 보이려고만 하고 있다. 수치를 모르는 클로디어스 왕은 문학 작품에만 있지 않다.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만 하고 있던 우유부단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차마 용인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양심과 상식의 회복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우리 시대의 햄릿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