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칼럼] 원·엔 상대환율이 문제다
경제 지표가 모두 암울하지만 그나마 괜찮은 것이 수출이다. 낙관론을 펴는 정부가 유일하게 믿는 구석이기도 하다. 숫자는 나쁘지 않다. 지난달에도 전년 동기 대비 두 자릿수(13.9%) 증가세를 유지했다. 수출액(571억달러)은 역대 7월 기준으로 두 번째다. 이대로면 연간 사상 최대 기록(7000억달러) 달성도 가능하다는 게 정부 기대다. 정부는 더 나아가 수출 호조가 내수 부진 탈출까지 이끌 것이라는 희망 회로를 열심히 돌리고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의문이 생긴다. 우선 궁금한 것이 환율 효과다. 원·달러 환율은 올 들어 7월 말까지 6.7% 올랐다. 환율 상승은 달러표시 수출가격을 낮추므로 그만큼 수출에 플러스 요인이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 입에서 환율 효과는 전혀 언급이 없다. 왜일까.

지금의 수출 증가는 환율 효과와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생산하는 제품의 65% 이상은 여전히 일본 제품과 경합한다. 철강, 기계, 자동차부품, 화학·정유제품 등이 대표적이다. 올 들어 엔·달러 환율은 슈퍼엔저 속에 14.2% 올랐다. 원화 환율 상승폭의 두 배 이상이다. 달러 표시 일본 제품 가격 경쟁력이 그만큼 높아져 오히려 환율 효과를 일본 제품이 누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거꾸로 원·달러 환율 상승에도 우리 제품의 상대적인 수출 가격경쟁력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그럼에도 국내 수출이 호조로 나타나는 이유는 반도체에 있다. 반도체는 이미 일본과의 경합에서 벗어나 우위를 점한 지 오래다. 반도체 수출은 매달 50% 이상 급증하는 추세다. AI(인공지능) 관련 전방산업 수요 확대로 주력 제품인 메모리 수출도 덩달아 크게 늘고 있는 덕분이다.

반도체 착시를 걷어내면 전혀 다른 통계가 나온다. 7월 수출 증가폭은 4%대로 확 줄어든다. 지난 6월에는 -5.4%로 후퇴했다. 반도체를 제외한 한국 수출은 5월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이다. 반도체 경기마저 꺾이고, 슈퍼엔저가 더 이어진다면? 지금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일본은행이 이달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슈퍼엔저 시대가 저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일본 금리 인상에 대해 벌써 실책이란 비판이 쇄도한다. 주요 선진국이 경기 침체에 대비해 일제히 금리 인하로 돌아서는 와중에 나 홀로 ‘역(逆)피벗’에 나선 것이 ‘장고 끝 악수’였다는 비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추가 금리 인상을 밀어붙이긴 쉽지 않다.

최근 한국 경제의 수출 호조 이면에는 이런 슈퍼엔저의 위험성이 가려져 있다. 반도체 호황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슈퍼엔저 여파는 곧바로 드러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원·엔 상대환율 10 대 1의 법칙’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원화와 엔화의 달러에 대한 상대환율이 10 대 1을 밑도는 수준으로 벗어나면 대외균형이 빠르게 무너져 위기로 치닫게 된다는 법칙이다. 실제 우리의 대외균형은 10 대 1 법칙에 따라 움직였다. 원·엔 상대환율과 경상수지 추세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보통 1년~1년6개월 시차를 두고 경상수지가 원·엔 환율을 후행하는 패턴을 보였다. 원·엔 상대환율이 10 대 1을 벗어나면 1년~1년6개월 뒤 경상수지가 곤두박질친다는 얘기다.

외환위기 전인 1995년 ‘역플라자 합의’에 따라 엔화 환율이 오른 반면 한국은 저환율 정책을 편 까닭에 원·엔 상대환율이 10 대 1 밑으로 급격히 무너졌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는 100엔당 711원대까지 하락했다. 그 결과 수출이 급감했고 기업들은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다. 금융위기 때도 비슷했다. 2000년대 초부터 이어진 미국의 달러 약세 정책에다 한국 외환당국의 미온적 대응으로 원화의 절상폭이 상대적으로 컸다. 2002~2007년 원화가 40% 정도 뛰는 사이 엔화는 15% 절상에 그쳤다. 2007년 원·엔 환율은 100엔당 789원까지 하락했다. 2009년 수출이 13.9% 급감했고 그 여파로 성장률은 0%대로 추락했다.

지금 원·엔 상대환율도 2년5개월째 10 대 1 밑으로 내려와 있다. 그나마 반도체 덕분에 그 여파가 감춰져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이미 위기 경고등은 켜졌고, 과거 실패를 되풀이할지 말지는 순전히 외환당국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