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가 요즘 사람이라면 킴 카다시안보다 더 스타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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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연아의 프렌치 시크
프랑스 최초의 패션 인플루언서 마리 앙투아네트!
단두대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
이제는 트렌디함의 아이콘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패션 인플루언서로 만든
예술 작품들
프랑스 최초의 패션 인플루언서 마리 앙투아네트!
단두대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
이제는 트렌디함의 아이콘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패션 인플루언서로 만든
예술 작품들
고통과 피로 물든 파리!
파리 올림픽 개막식 공연 중 전 세계에 논란이 된 장면 중 하나는 콩시에르주리 궁전이 불에 타고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피처럼 선명한 빨간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기의 잘린 머리를 들고 혁명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지금의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과 피로 물들었던 파리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노래하는 이곳은 파리 중심부 센강변에 있는 중세 건물 콩시에르주리 궁전으로 14세기부터 정치범 감옥으로 쓰던 곳이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남편 루이 16세와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올림픽 팬 존이 설치되어 매일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는 파리 시청 앞 광장과 BMX free style, 브레이킹 댄스, 스케이트보드, 3×3 농구 경기가 열리는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 올림픽 기간 중 환호와 즐거움의 도가니가 되고 있지만, 사실 항상 활기차고 즐거움을 나누는 곳이 아니었다. 이 광장은 중세기부터 마녀로 찍힌 여자들을 불에 태워 죽이거나 팔과 다리, 사지를 끈으로 묶어 말로 끌어 처형하거나 머리를 잘라 죽이는 처형 장소로, 고통과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려 처형되었는데 단두대는 선고받은 사람의 머리를 가장 빠르게 절단하여 가능한 고통 없이 빠르게 처형하기 위해 프랑스 의사 기요틴(Guillotine)이 발명하였는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3년 동안 약 2,700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단두대는 1977년까지 오랫동안 사형집행에 사용되었었고 1981년부터 사형 처벌이 완전히 없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 슈퍼스타!
만약 마리 앙투아네트가 지금 태어났다면 아마도 킴 카다시안보다 더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사치와 타락의 원흉의 왕비로 각인되고 오랫동안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는 낭비와 사치의 왕비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연구 서적, 소설, 영화, 수많은 예술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미움과 사랑을 번갈아 가며 이제는 트렌디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역사적인 대표 인물이 되었다.
아마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가 슈퍼스타로 부각된 것은 2006년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의 영화에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바로크풍의 화려한 배경과 의상 그러나 너무나 로큰롤하고 펑크 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은 현대의 트렌디한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뮤즈처럼 사진이나 그림으로 재현시키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아름다운 외모와 기품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뛰어난 화술을 가진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프랑스 사교계를 사로잡았으며, 패션계에 유행을 만들어 가는 패션 스타이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작품을 통해 오히려 그녀는 국민들을 생각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성격에 예술적 안목을 갖춘 독립적인 왕비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200년이 지난 지금은 영국 다이애나 왕비와 함께 화려하지만 강압된 '왕비의 삶'에 구속되지 않고 민감하면서도 반항적인 삶의 여주인공, 아름다운 예술의 여인상으로 사람들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유행과 트렌드를 만들어 낸 왕비
2020년 콩시에르주리 감옥에서 지난 2세기 동안 제작된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련된 작품들을 모아 전시가 열렸었다. 이 전시를 통해 또 한 번 마리 앙투아네트가 얼마나 프랑스 유행을 이끌어가는 캐릭터 상품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카롱, 파티스리, 식기, 인형, 초콜릿 및 코스메틱 제품이 담긴 상자 등에 왕비의 이미지를 다양한 스타일로 반영하였고, 특히 캔디 핑크색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렌치 시크와 우아함의 상업적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작품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아티스트인 아지아 코지나(Asya Kozina)의 작품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표적인 머리 장식인 라벨뿔(La Belle-Poule) 가발을 종이 커팅을 하여 만든 작품이다. 아지아 코지나의 종이 커팅 작품은 언제 봐도 그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라벨뿔은 1778년 6월 17일, 브르타뉴 해안에서 영국 호위 군함과 충돌한 프랑스 호위 군함의 이름이다. 4~5시간 동안 계속된 이 전투는 프랑스 왕이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속 디자이너였던 로즈 백탕(Rose Bertin)과 전속 미용사였던 레오나(Léonard)는 왕비를 위해 프랑스 군함 라벨뿔의 모습으로 머리 장식을 했고 궁중의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후 헤어스타일 뿌프(Pouf)는 점점 더 크고 기발한 모양으로 유행했고, 궁중을 산책하고 살롱에서 연회를 즐기며 새로운 스타일을 서로 자랑했다. 뿌프 머리 스타일은 철사와 천, 머리, 가짜 머리, 동물 털 등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무게가 심지어는 5kg을 넘어갈 때도 있었고 점점 높아져 1m까지 올라가기도 했으며 제작비용도 어마어마했다. 직접 머리에 장식하는 시간만 해도 4~5시간이 필요했다니.. 오페라나 연회에 도착하면 벌써 지쳤을 것 같다.
왕비의 전속 디자이너이었던 로즈 백탕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왕비의 모든 의상, 액세서리를 디자인, 제작하였고 파리 시내에 르 그랑 모골(le grand mogol)이라는 매장을 열어 프랑스 귀족들 뿐 아니라 유럽 일대의 귀족 여인들이 즐겨 찾는 최초의 패션 백화점 역할을 하였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궁전 정원에 왕비를 위해 지은 소박한 농장에서 천민들이 먹던 천한 감자의 꽃을 모자에 꽂고 살기 시작한 왕비를 위해 로즈 백탕은 잠옷을 개조하여 일종의 셔츠 드레스인 라호브 쉬미즈( la robe-chemise)를 만들어 귀족들 사이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헝(Elisabeth Vigée-Lebrun)은 잠옷을 개조한 라호브 쉬미즈를 입은 왕비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왕비가 입고 있는 의상이 왕비의 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받아 화려한 코르셋 레이스 드레스와 모자를 쓴 모습으로 초상화를 다시 그려야만 했다. 1774년 왕비의 요청으로 로즈 백탕과 레오나는 주흐날데담(Journal des Dames)이라는 패션 잡지를 만들어 왕비의 아웃 핏을 소개하고 패션 유행을 이끌어 가기도 했다. 로즈 백탕은 그 당시 패션 장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명성이 높아 명품 브랜드로 급성장하고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의 아니게 로즈 백땅의 패션 인플루언서의 역할을 한 셈이다.
파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날 수 있는 곳
파리 밀랍 인형 박물관인 그래뱅 뮤지엄 (Musée Grevin)에는 전 세계 유명인들의 모습을 실제 크기로 밀랍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트쿠튀르 디자이너인 줄리앙 후흐니에(Julien Fournié)가 디자인한 드레스로 2024년 6월 파리 패션위크에 새 단장을 했다. 새로 제작된 이 드레스는 프랑스 오트 쿠튀르로 4개월간 아뜰리에에서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졌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표적인 머리장식인 «라벨뿔»가발을 착용하고 있다.
다행히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리기 전의 마리 앙투아네트 모습을 재현한거라 그래뱅 뮤지엄을 방문하면 함께 셀피를 찍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연아 패션& 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
파리 올림픽 개막식 공연 중 전 세계에 논란이 된 장면 중 하나는 콩시에르주리 궁전이 불에 타고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피처럼 선명한 빨간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기의 잘린 머리를 들고 혁명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지금의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과 피로 물들었던 파리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노래하는 이곳은 파리 중심부 센강변에 있는 중세 건물 콩시에르주리 궁전으로 14세기부터 정치범 감옥으로 쓰던 곳이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남편 루이 16세와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올림픽 팬 존이 설치되어 매일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는 파리 시청 앞 광장과 BMX free style, 브레이킹 댄스, 스케이트보드, 3×3 농구 경기가 열리는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 올림픽 기간 중 환호와 즐거움의 도가니가 되고 있지만, 사실 항상 활기차고 즐거움을 나누는 곳이 아니었다. 이 광장은 중세기부터 마녀로 찍힌 여자들을 불에 태워 죽이거나 팔과 다리, 사지를 끈으로 묶어 말로 끌어 처형하거나 머리를 잘라 죽이는 처형 장소로, 고통과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려 처형되었는데 단두대는 선고받은 사람의 머리를 가장 빠르게 절단하여 가능한 고통 없이 빠르게 처형하기 위해 프랑스 의사 기요틴(Guillotine)이 발명하였는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3년 동안 약 2,700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단두대는 1977년까지 오랫동안 사형집행에 사용되었었고 1981년부터 사형 처벌이 완전히 없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 슈퍼스타!
만약 마리 앙투아네트가 지금 태어났다면 아마도 킴 카다시안보다 더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사치와 타락의 원흉의 왕비로 각인되고 오랫동안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는 낭비와 사치의 왕비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연구 서적, 소설, 영화, 수많은 예술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미움과 사랑을 번갈아 가며 이제는 트렌디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역사적인 대표 인물이 되었다.
아마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가 슈퍼스타로 부각된 것은 2006년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의 영화에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바로크풍의 화려한 배경과 의상 그러나 너무나 로큰롤하고 펑크 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은 현대의 트렌디한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뮤즈처럼 사진이나 그림으로 재현시키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아름다운 외모와 기품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뛰어난 화술을 가진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프랑스 사교계를 사로잡았으며, 패션계에 유행을 만들어 가는 패션 스타이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작품을 통해 오히려 그녀는 국민들을 생각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성격에 예술적 안목을 갖춘 독립적인 왕비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200년이 지난 지금은 영국 다이애나 왕비와 함께 화려하지만 강압된 '왕비의 삶'에 구속되지 않고 민감하면서도 반항적인 삶의 여주인공, 아름다운 예술의 여인상으로 사람들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유행과 트렌드를 만들어 낸 왕비
2020년 콩시에르주리 감옥에서 지난 2세기 동안 제작된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련된 작품들을 모아 전시가 열렸었다. 이 전시를 통해 또 한 번 마리 앙투아네트가 얼마나 프랑스 유행을 이끌어가는 캐릭터 상품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카롱, 파티스리, 식기, 인형, 초콜릿 및 코스메틱 제품이 담긴 상자 등에 왕비의 이미지를 다양한 스타일로 반영하였고, 특히 캔디 핑크색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렌치 시크와 우아함의 상업적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작품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아티스트인 아지아 코지나(Asya Kozina)의 작품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표적인 머리 장식인 라벨뿔(La Belle-Poule) 가발을 종이 커팅을 하여 만든 작품이다. 아지아 코지나의 종이 커팅 작품은 언제 봐도 그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라벨뿔은 1778년 6월 17일, 브르타뉴 해안에서 영국 호위 군함과 충돌한 프랑스 호위 군함의 이름이다. 4~5시간 동안 계속된 이 전투는 프랑스 왕이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속 디자이너였던 로즈 백탕(Rose Bertin)과 전속 미용사였던 레오나(Léonard)는 왕비를 위해 프랑스 군함 라벨뿔의 모습으로 머리 장식을 했고 궁중의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후 헤어스타일 뿌프(Pouf)는 점점 더 크고 기발한 모양으로 유행했고, 궁중을 산책하고 살롱에서 연회를 즐기며 새로운 스타일을 서로 자랑했다. 뿌프 머리 스타일은 철사와 천, 머리, 가짜 머리, 동물 털 등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무게가 심지어는 5kg을 넘어갈 때도 있었고 점점 높아져 1m까지 올라가기도 했으며 제작비용도 어마어마했다. 직접 머리에 장식하는 시간만 해도 4~5시간이 필요했다니.. 오페라나 연회에 도착하면 벌써 지쳤을 것 같다.
왕비의 전속 디자이너이었던 로즈 백탕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왕비의 모든 의상, 액세서리를 디자인, 제작하였고 파리 시내에 르 그랑 모골(le grand mogol)이라는 매장을 열어 프랑스 귀족들 뿐 아니라 유럽 일대의 귀족 여인들이 즐겨 찾는 최초의 패션 백화점 역할을 하였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궁전 정원에 왕비를 위해 지은 소박한 농장에서 천민들이 먹던 천한 감자의 꽃을 모자에 꽂고 살기 시작한 왕비를 위해 로즈 백탕은 잠옷을 개조하여 일종의 셔츠 드레스인 라호브 쉬미즈( la robe-chemise)를 만들어 귀족들 사이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헝(Elisabeth Vigée-Lebrun)은 잠옷을 개조한 라호브 쉬미즈를 입은 왕비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왕비가 입고 있는 의상이 왕비의 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받아 화려한 코르셋 레이스 드레스와 모자를 쓴 모습으로 초상화를 다시 그려야만 했다. 1774년 왕비의 요청으로 로즈 백탕과 레오나는 주흐날데담(Journal des Dames)이라는 패션 잡지를 만들어 왕비의 아웃 핏을 소개하고 패션 유행을 이끌어 가기도 했다. 로즈 백탕은 그 당시 패션 장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명성이 높아 명품 브랜드로 급성장하고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의 아니게 로즈 백땅의 패션 인플루언서의 역할을 한 셈이다.
파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날 수 있는 곳
파리 밀랍 인형 박물관인 그래뱅 뮤지엄 (Musée Grevin)에는 전 세계 유명인들의 모습을 실제 크기로 밀랍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트쿠튀르 디자이너인 줄리앙 후흐니에(Julien Fournié)가 디자인한 드레스로 2024년 6월 파리 패션위크에 새 단장을 했다. 새로 제작된 이 드레스는 프랑스 오트 쿠튀르로 4개월간 아뜰리에에서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졌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표적인 머리장식인 «라벨뿔»가발을 착용하고 있다.
다행히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리기 전의 마리 앙투아네트 모습을 재현한거라 그래뱅 뮤지엄을 방문하면 함께 셀피를 찍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연아 패션& 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